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윤덕여 여자대표팀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국축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묘사했다. 스포츠동아DB
벨기에·스페인·우루과이에 3전패, 1득점·6실점
“아시아 최강의 자부심 무너져…상대가 안돼”
“남자가 좋은 성적 내야”…러월드컵 선전 당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은 일대 파란 속에 시작됐다. 지금까지도 역대 월드컵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언급되는 카메룬-아르헨티나의 개막전. 월드컵 통산 성적이 3무에 불과했던 ‘불굴의 사자군단’은 지난 대회 우승국을 1-0으로 제압하며 세계축구계를 술렁이게 했다. 격변의 기운은 한국축구를 들뜨게 했다. 4년 전 멕시코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전한 기억도 생생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16강으로의 도약. 한국축구는 자신만만했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계의 벽은 높기만 했다. 첫 상대 벨기에에 0-2로 완패한 데 이어 스페인에는 1-3, 우루과이에는 0-1로 무너졌다. 8강까지 오른 카메룬이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동안 한국축구는 초라한 현실과 막연한 기대가 빚어낸 처참한 결말에 몸서리를 쳤다. 지금은 여자축구의 선구자로 각광받고 있는 윤덕여(57) 여자국가대표팀 감독은 이탈리아월드컵을 떠올리며 안일했던 자신과 한국축구를 ‘우물 안 개구리’로 묘사했다.
-이탈리아월드컵에선 3패를 당하고 말았다. 역대 최악의 결과를 낸 대회 중 하나다.
“아시아 최종예선 때는 한 번도 안 지고, 실점도 한 골밖에 없어서 멕시코월드컵보다 좋은 성과를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대회를 마치고 나니 우물 안 개구리였다. 모두 대회에 들어가서야 처음 상대해보는 강팀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유럽이든 남미든 (A매치를 치르는 대신) 기껏해야 클럽 팀들이랑 경기를 해본 게 전부였다. 유럽과 남미의 국가대표팀 수준은 (아시아권 국제대회 또는 친선경기에서 맞붙은 클럽들보다) 확실히 높았다.”
-벨기에전에는 결장했다. 그 뒤 스페인전, 우루과이전에는 모두 출전했다. 벨기에전에 나서지 못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나?
“벨기에전을 앞두고 주전과 비주전으로 나눠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그 때는 A팀(주전)이었다. 그 경기에서 부진했다. 월드컵 데뷔무대를 앞두고 부담감이 커서였는지 컨디션이 별로였다. 감독님(이회택)이 안 되겠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기용 여부는 결국 감독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벨기에전 경기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벨기에가 그렇게 강했나? 변변한 공격 한 번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완패했다.
“벤치에서 지켜보는데 도저히 상대가 안 되겠더라. 지금은 과학적으로 상대를 분석하는 게 기본이지만, 그 때 우리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시아에선 최강이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유럽의 강호와 맞부딪혀보니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첫 경기부터 무기력하게 패했으니 다음 경기를 준비하면서는 분위기가 무척 무거웠을 것 같다.
“스페인전을 앞두고는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벨기에한테 지고 나서는 당연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회복훈련을 겸해 호텔 수영장에서 잠깐 쉬었는데, 방송을 통해 ‘축구대표팀이 한가하게 놀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가 나갔다. 내 기억으로는 수영장 장면 자체도 방송사의 요청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모두가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그래도 스페인을 상대로는 선전하지 않았나? 황보관의 프리킥 동점골은 그림 같았다.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갔고, 전반에는 대등하게 싸워 1-1로 마쳤다. (벨기에전 패배와 수영장 사건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분발하자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후반 들어 체력이 떨어지자 스페인의 개인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해트트릭을 달성한 미첼은 움직임이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수비수를 등진 채) 돌아나가는 능력도 뛰어나더라. 그 전까지 우리가 한 번도 상대해본 적이 없는 세계 정상급 공격수였다.”
-우루과이전은 더 아쉬웠을 듯하다. 종료 직전 오프사이드 논란을 낳은 골을 내주고 패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퇴장까지 당해 더 낙담했을 것 같다. 퇴장 판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결승골(후반 45분)을 넣은 폰세카는 과거 대통령배대회 때 클럽 소속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선수라 (플레이 스타일을) 약간은 알고 있었다. 당시 꽤 유명한 선수였고, 기량이 좋았다. 롱패스로 넘어온 볼을 폰세카가 헤딩으로 슛했는데, 오프사이드였다. 이탈리아 심판으로 기억하는데, 우루과이한테 계속 유리한 판정을 했다. 후반 25분 경고누적으로 퇴장 당했다. 선수생활을 통틀어 경기 도중 퇴장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에는 백패스 금지 규정이 없었는데, 비기기 위해 골키퍼(최인영)와 내가 볼을 주고받으며 지연행위를 했다며 옐로카드를 내밀었다.(지연작전을 펼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억울할 법한 상황이었다)”

여자축구대표팀 윤덕여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86년 멕시코에선 36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고도 1무2패로 선전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월드컵을 앞두고는 팬들은 물론 언론의 기대도 컸다.
“우리 스스로도 조별리그 통과를 목표로 삼았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한 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했으니 자신감이 있었다. 멕시코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도 여럿(정용환·박경훈·노수진·김주성·조민국·정종수·최순호·변병주·이태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연한 기대였다. 세계적 수준과 격차가 컸다.”
-아시아 최종예선 때(1989년 10월)는 언제가 고비였나?
“1차 예선은 전승(6승무패)으로 통과했고, 최종예선은 6개국이 싱가포르에 모여서 치렀다. 첫 경기가 어려웠다. 비교적 약체로 봤던 카타르한테 (0-0으로) 비겼다. 언론에서도 비판을 가했고, 우리 스스로도 좀 당황했다. 그래도 다음 3경기(북한·중국·사우디아라비아)를 모두 이기면서 UAE(아랍에미리트)와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전에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UAE전에는 나를 비롯해 주전들이 많이 빠졌는데도 (1-1로) 비겼다.”
-이탈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인데,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겠다.
“2003년에 U-17 대표팀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우승까지 차지했다. 경기장도, 주변의 항구도 익숙한 기분이어서 주민들한테 물어보니 이탈리아월드컵 때 우리가 스페인전과 우루과이전을 치른 곳(우디네 델프리울리 스타디움)이었다. 13년 만에 다시 감독으로 같은 장소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수들과 함께 그 지역팀(우디네세)의 세리에A 경기도 관전했다.”

여자축구대표팀 윤덕여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대기만성형이었나?
“1989년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한일전(동대문·1-0 승)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로 가지 않고 한일은행에서 2년간(1984~1985년) 뛰었다. 그러다보니 국가대표로 데뷔할 기회가 좀 늦어졌던 것 같다. 김호 감독님이 한일은행을 맡고 계셨는데, 그 때만 해도 프로가 초창기라 한일은행에서 안정적인 선수생활을 택했다. 나중에 울산현대(1986~1991년)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서 활약했는데, 인연이 있어서인지 다시 김호 감독님을 만났다. 김호 감독님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애정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호 감독님은 선수시절 김정남 감독님과 함께 명 수비수였다.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그 가르침 덕분에 특히 수비수로서 갖춰야 할 시야가 넓어졌다.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여자대표팀은 이제 내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에 올랐고, 남자대표팀은 당장 6월이면 러시아월드컵 본선이다. 남녀대표팀이 나란히 좋은 성과를 거뒀으면 한다.
“남자가 더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남자가 (축구 인기의 부활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여자)는 1년 동안 잘 준비하면 된다.”
● 윤덕여 감독은?
▲생년월일=1961년 3월 25일
▲출신교=경신중~경신고~성균관대
▲프로선수 경력=울산현대(1986~1991년), 포항 스틸러스(1992년)
▲지도자 경력=포항제철중 감독(1993~1995년), 포항 스틸러스 수석코치(1996~1999년), 17세 이하(U-17) 대표팀 감독(2001~2003년), 울산현대 코치(2004~2005년), 경남FC 수석코치(2006~2009년), 대전 시티즌 수석코치(2010년),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2011~2012년), 여자국가대표팀 감독(2013년~현재)
정재우 기자 jac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