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영화 ‘밀양’, 자식을 앗아간 ‘그놈’…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입력 2018-06-04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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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유일한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들을 잃은 뒤 여자(전도연)는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 속에서 헤맨다. 이를 바라보는 남자(송강호)는 함께 나눌 수 없는 고통으로 또 아파한다. 사진출처|영화 ‘밀양’ 캡처

■ 영화 ‘밀양’이 던진 영원한 화두

이웃에 의해 살해된 외동아들
이웃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고
그는 살인자를 용서하려했지만
“벌써 용서받았다”는 살인마…

“속물 같아요.”

이러나저러나, 어떤가.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아서 “그냥 사는 거” 아니던가.

대가를 바라지 않은 진심의 배려가 못내 부담스러웠나보지. 아니면 촌티 가득한 소도시에서 ‘한 다리’만 건너도 모두가 알고 지내며 ‘형님, 동생’ 하는 일상, 그래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생활이 도시생활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시선에선 낯선 것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 그 작은 도움과 배려의 세상살이를 짐짓 자랑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비쳤던 모양이지.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시골의 소박함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비친 탓이라면 또 어떨까. 아무려나, 그것도 사람의 세상이니까.

하늘 맑은 날이었다. 그렇게 여자를 만난 것은.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가슴 쥐어뜯는 고통 앞에서…

여자는 “새로 시작할 거”라며 내려와 터를 잡았다. 여자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어떤 아픔이 있어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연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애써 묻지 않는다.

한때 터무니없이 알량한 도시인의 우월감을 드러냈던 여자였다. 지나간 사연과 아픔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한 바, 그걸 보고 무어라 하는 것도 괜한 일이다. “속물 같아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저 웃기만 한 진짜 이유도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여자에게 어느 날 감당해낼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여자는 무참하게 아이를 잃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어서 좋다던 땅은 여자에겐 더할 수 없는 지옥이 되어 버렸다. 아이를 해한 놈을 한 대 쥐어박으려 하는데, 여자는 놈의 시선을 피한다. 왜일까.

그러고서 여자는 새끼를 잃은 원통함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내리치며 목을 놓는다. 통곡은 마치 비명 같다. 대체 온통 꽉 막혀서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가슴의 고통은 얼마만한 크기를 지닌 것일까.

짐작할 뿐이지만 또 묻지 않는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겠다는 섣부른 말도 건네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런 어설픈 배려와 물음이야말로 여자에겐 또 다른 고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는 목을 놓은 통곡 속에서, 통곡 끝에서 살아났다. 다만 시퍼렇게 멍든 가슴은 그대로인 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여자는 교회에 나갔다. “누가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는데, 평화를 얻었다”면서 여자는 교회를 찾았다.

여자를 따라 교회에 함께 나가 예배를 드렸다. 교회 앞 도로에서 주차 관리도 자원했다. 여자는 때로 “정말 믿음이 있느냐. 지금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면박을 주면서도 애써 피하지 않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여자가 편안함을 얻고, 덕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애틋함의 시선엔 행복한 일이 아닌가.

하늘 맑은 날이었다. 교도소 문을 나오는 순간, 여자가 정신을 잃은 것은.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용서는 대체 가능한가

여자는 교도소를 찾아가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놈을 용서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놈은 말했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죄를 용서해주셨다.”

여자는 끝내 정신을 잃었다. 아이를 잃은 직후 놈의 시선을 피했던 건 어떤 공포 같은 것이었을까. 여자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여자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대체 어떻게 앙갚음을 해야 할지 모르는 대상을 향해 여자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자는 자신이 아직 용서하지 않은 가해의 행위를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냐”며 절규했다.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의 고통에서 이제는 헤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스로 감당해낼 수 없어 오로지 피폐함으로써 야위어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너한테 안 져. 절대 안 져!”라고 다짐하지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스스로 피폐해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신의 심신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서야 감당해낼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허망한 결심 때문이었을까.

하늘 맑은 날이었다. 여자는 끝내 스스로를 그어버렸다.

영화 ‘밀양’의 포스터 컷. 한 줄기 빛과 힘없이 누운 여자의 표정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그래도 땅 위엔 볕과 그림자가…

고통에서 잠시 놓여나 여자는 잠에 빠져들었다. 알 수 없는 깊이를 감춘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여자의 머릿결에선 어떤 냄새가 날까. 코를 가져다 댄 순간, 아련한 현기증이 인다. 여자가 스스로를 그어버릴 때 느꼈을지 모를 가슴 데일 만큼 뜨겁게 고통스러웠을 어지럼증은 결코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애처로움을 져버릴 수 없으니, 이 가련한 여자의 곁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고 했다.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잠에 빠져들기 전 아픔과 결별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욕망처럼 보였다. 그건 대단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또 살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과 삶이 불현듯 안겨준 고통이 어디 그리 쉽게 사그라지던가. 잊고 또 잊고 싶은 지옥 같은 현실의 아픔은 ‘새록새록’ 치밀어 오르기만 한다. 그럴 때 신은 무슨 권리가 있어 사람의 세상을 간섭할 수 있을까.

여자는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옆에 서서 거울을 들어주기로 했다. 거울을 들어 여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잘라낼 수 있도록 거들어주기로 했다. 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거렸다.

하늘 맑은 날이었다. 사각사각 잘려진 여자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봄바람에 날려 땅에 살포시 떨어 앉은 것은.

하늘 맑은 날이었다. 그로부터 내려온 빛이 마치 뭔가를 숨겨둔 것처럼 땅을 비추지만 그래도 그만한 한 줌의 볕과 그림자를 만들어 내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영화 ‘밀양’은?

5월 막을 내린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신작 ‘버닝’으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2007년도 작품이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 정착하려다 아들을 무참히 잃은 여자(전도연)의 고통, 이를 바라보며 그 곁을 맴도는 남자(송강호)의 애처로움. 이를 통해 구원과 용서의 의미를 물었다. 새끼 잃은 어미의 더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토해낸 전도연에게 제60회 칸 국제영화제는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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