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절친’ 학범슨 vs 쌀딩크, AG 제왕 대관식 향한 마지막 충돌

입력 2018-08-29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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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 김학범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둘은 잡초였다. 한 순간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어렵사리 그 문턱까지만 갔을 뿐, 더 이상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AG)에 출격한 대한민국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 김학범(58) 감독과 베트남 U-23 대표팀 박항서(59) 감독이 운명의 승부를 앞두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29일 오후 6시(한국시간)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보고르 치비농의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남자축구 결승 티켓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다.

누군가 웃으면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잔인한 혈투.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국내 지도자들이 많지도 않지만 국제대회에서 결승행을 놓고 자웅을 겨루는 사례는 더욱 흔치 않아 축구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김 감독에게는 이번 자카르타-팔렘방AG가 주요 대표팀 사령탑 자격으로 처음 출전하는 무대이다. 박 감독에게는 2002년 부산대회 이후 두 번째 AG 출전이다. 16년 전 한국은 이란과 4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패해 동메달에 그쳤다. 지난해 10월 베트남 A대표팀과 U-23 대표팀 총괄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 감독은 1월 중국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에 이어 AG 4강 신화를 이끌어 베트남 내에서 ‘국민영웅’ 반열에 올랐다.

K리그에서 한솥밥을 먹은 초록 그라운드에서는 항상 치열한 전투를 펼쳤지만 김 감독과 박 감독은 두터운 친분을 자랑한다. 점차 젊어지는 추세의 벤치를 외롭게 지켜가면서 쌓은 오랜 정이다.

후배인 김 감독은 실제로는 세 살이 더 많은 박 감독을 지금도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한다. 국내에서 함께 활동할 때는 시즌 전후로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고 커피 한 잔을 곁들인 맞담배를 피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잘 알려졌지만 술을 멀리 하는 김 감독은 쓰디쓴 에스프레소 마니아다. 잠시 현장을 떠난 시기에도 둘은 꾸준히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살뜰히 챙겼다. 자카르타-팔렘방AG에서도 한국과 베트남이 같은 숙소를 쓰고 있어 훈련장, 경기장을 오고가며 자주 마주친다는 후문이다.


서로가 걸어온 길은 달랐다. 연령별 대표팀부터 국가대표팀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은 박 감독과 달리 김 감독의 현역시절은 화려하지 않았다. 철저한 무명이었고, 은퇴 후에도 불러준 곳이 없어 한동안 은행원의 평범한 삶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축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코치로 활약한 1996애틀랜타올림픽을 통해 지도자 김학범의 존재를 알렸고, 1998년 성남일화(현 성남FC) 코치로 합류하면서 프로 지도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밟아나갔다.

진짜 사령탑이 되기까지의 시간도 길었다. 7년을 코치로 보낸 그는 2005년 정식 감독으로 임명돼 이듬해 소속 팀의 K리그 우승을 지휘했다. 축구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름 이상의 여유만 생기면 작은 가방과 노트북만 챙겨 어디든 훌쩍 떠났다. 행선지도 다양했다.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남미부터 독일~영국~스페인 등 유럽까지 전 세계 구석구석에 발 도장을 찍었다.

그러면서도 감독 2년차인 2006년 박사학위까지 받아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공부하는 감독’ 이미지를 남겼다. 쏘아보는 듯한 매서운 눈빛과 강한 카리스마, 탁월한 전략을 갖춘 그에게 팬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를 오랫동안 이끈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이름을 따 ‘학범슨’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

AFC U-23 챔피언십에서의 부진으로 경질된 김봉길(52) 전 감독의 후임을 찾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 김판곤(49) 위원장을 만났을 때, 김 감독이 무려 수십 페이지짜리 방대한 분량의 기술 분석 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자료를 직접 접한 선임위원들과 협회 고위 임원들은 “김 감독은 (모든 후보군 가운데) 단연 압도적이었다. 준비된 감독이었다. 정말 대단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베트남 남자 축구대표팀 박항서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박 감독은 후배들에 대한 평가를 자제하는 편이지만 김 감독에게는 예외를 둔다. 틈날 때마다 지인들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친구에게 대한민국 A대표팀을 이끌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솔직히 자신도 외로운 인생이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72·네덜란드) 감독을 보좌하며 4강 신화를 함께 한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변방에서 보냈다. 히딩크 감독과 함께 한 과거의 이력과 베트남 주산물 쌀을 더해 ‘쌀딩크’로 불리며 사랑 받는 박 감독이 “인기는 금세 꺼질 거품”이라며 경계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다.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다. 조별리그 2위(2승1패)로 토너먼트에 오른 한국은 이란에 이어 우즈베키스탄을 연장 혈투 끝에 제압했고 조 1위(3승)의 베트남은 바레인을 꺾은 뒤 시리아마저 연장전에서 물리쳐 ‘감독판 코리안 더비’를 앞두게 됐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K리그 상대전적(정규리그·컵 대회)은 8승1무1패로 김 감독이 우위이고 객관적인 전력도 한국이 앞서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AG 정상까지 두 걸음. 마지막 방점을 찍고 드라마를 완성시키려는 김 감독과 박 감독의 운명은 어떻게 열릴까.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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