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장그래가 나아간 길은 ‘완생’으로 향했을까

입력 2019-02-14 06:57: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드라마 ‘미생(未生)’.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히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바둑 용어를 제목 삼아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렸다. ‘완생’으로 나아가려는 인물들의 희로애락이 시청자의 높은 공감을 얻었다. 사진제공|tvN

■ 드라마 ‘미생’

두 갈래 길 강요받는 이 시대 미생들
절박하게 선택…돌아올 수 없는 길
희망을 꿈꾸며 묵묵하게 걸어갈 뿐


새로운 다짐으로써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스트는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 아마도 더 끌렸던’ 한 길을 택했다.(‘가지 않은 길’, 손혜숙 ‘미국 대표 시선’) 아직 아무도 발을 내딛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선택하며 스스로를 다져가려는 이들에게 이만큼 힘이 될 만한 표현이 있을까. 이를 인용한 세상 숱한 출사표가 그 방증이기도 하다.


● 판을 뒤집어 길을 내다

고대 유목민들의 화려했던 도시.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그가 이끈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며 거쳐 간 곳. 요르단 남부 페트라에서 장그래와 오상식은 프로스트를 떠올렸다. 무역상사 출신답게 향료무역으로 번성했던 고대의 영화로움을 새롭게 꿈꾸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장그래와 오상식은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힘겹게 걸어 나오지 않았는가. 갖은 수난과 고통 속에서도 함께 일하며 “판을 뒤집어” 새로운 길을 내왔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페트라의 길 위에서 실크로드 무역상들의 자취를 느끼며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 앞에 새로운 길이 놓여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그래는 말할 수 있었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는 길에 나선 프로스트의 선택을 뛰어넘는 다짐임에 틀림없다. 불운한 비정규직 장그래를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해낼 수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를 건사하려던 오상식도 답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더 이상 불운하지 않다. 감당해낼 수 없는 능력도 이들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람이 덜 다닌 길”이었기에 “걸으면서 나아가” 비로소 자신들의 새로운 길을 내어 꿈꾸던 미래로 내달려 가면 그만이었을 테니 말이다.

tvN 드라마 ‘미생’. 사진제공|tvN


● 똑같이 아름다운 길

하지만 만일 그 두 갈래 길이 본래 다르지 않다면 어떨까. 하나의 길을 버리고 또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것은 걸어가는 자의 몫이다. 다만 두 길이 결국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때의 선택이란 어떤 소용이 있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조선대 교수)은 바로 그 소용됨에 회의의 시선을 보냈다. 그는 프로스트가 “두 갈래 길 앞에” 선 채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단 통행이 드물다고 느껴지는 길”을 선택했다고 썼다. 하지만 두 갈래 길은 애초부터 같아서 그 앞에서 내놓은 선택이란 “이내 자신이 상황을 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적으로 치자면 / 지나간 발길들로 /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두 길은 ‘똑같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를 원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유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고, ”자신이 훗날 이날의 선택을 다소 미화된 방식으로 회상하게 되리라”고 신형철은 말했다.(2016년 7월1일 자 한겨레 ‘신형철의 격주시화’)

비장한 출사의 목전에서 너무도 허망한 해석일까.


● 다시 선택을…다만 절박하라

그래도 사람들은 다르지 않은 두 길의 갈래 앞에서 어찌됐든 하나의 길을 선택한 뒤 ‘한 길을 또 다른 날을 위해 남겨 두’고 ‘다시 오리라’고 믿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길은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길은 또 다시 두 갈래로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그 또 다른 두 갈래 길 앞에서 역시 다시 한 번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미생’들의 운명이니 말이다.

그런 ‘미생’들의 운명을 두고 프로스트는 말했다.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나는/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일단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말라는 충고일까. 아니면 오상식이 나아가며 다짐한 것처럼 새로운 길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라는 조언일까. 그도 아니면 장그래처럼 진취적 기상으로 앞날을 개척해가라는 메시지일까.

그 무엇이든, 다만 프로스트는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라 말했다. 인적이 없다 해도 나아가는 발들로써 발자국은 쌓이는 법. ‘전인미답’이란 애초부터 쉽게 쓰일 말이 아니라 믿는다.

그래서 두 갈래 길을 두고 고심한 끝에 내놓는 선택은 그 무엇이든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비록 후회 가득한 발걸음이었다 해도 그것 역시 두 갈래 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한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선택은 절박했으니, 그렇다면 뚜벅뚜벅 걸어 나아갈 수밖에. 건강한 두 다리로 땅바닥을 튼실하게 다져가며 그렇게 가 닿을 곳은 영화로운 추상의 미래가 아니다. 또 하나의 절박하고 구체적인 현실일 터이다.

장그래와 오상식의 선택 역시 그런 것이었으리라.

tvN 드라마 ‘미생’. 사진제공|tvN


■ 드라마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 삼은 2014년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무역상사에 취업한 고졸 출신 비정규직 장그래와 그가 일하는 영업3팀 오상식 차장의 직장생활기. 정윤정 작가팀의 실제 무역상사 취재를 통한 사실성과 김원석 PD의 연출력, 임시완과 이성민 등 연기자들의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원작 속 캐릭터와 ‘100% 싱크로율’을 자랑한 강하늘, 변요한, 강소라, 김대명 등 새로운 연기자들도 발굴한 무대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오늘의 핫이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