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예수정, 담백·섬세한 힘 ‘69세’ 안에…“늙음도 자연스럽게”

입력 2020-08-21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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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개봉한 영화 ‘69세’의 주연 배우 예수정은 백발을 고집한다. “늙음도, 부족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에서다. 사진제공|기린제작사

영화 ‘69세’에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예수정

“노년 여성을 보는 사회적 시선
흔하지 않은 소재에 흥미 느껴
사명감보단 내 길 걷는데 집중”
“실제 삶만큼 무거운 게 있나요. 이런 때에 저의 영화가 개봉하고,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괜찮아요. 다만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앞당긴 사람들, 아이도 아닌 어른들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배우 예수정(65)이 ‘부끄러움’에 대해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상황에 기름을 부은 장본인들을 향한 비판이다. 실내 50명 이상 집합금지 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주연 영화 ‘69세’(감독 임선애·제작 기린제작사)가 20일 개봉하고, 이달 23일까지 계획했던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공연이 급히 중단됐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보다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삶”의 위기에 대해 더 큰 걱정을 쏟아냈다.

영화 개봉일인 20일 오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예수정은 “긴 장마 끝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불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긍정과 평화, 기쁨의 기운이 넘쳐야 하는 광장을 반대의 기운으로 채운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불편하다”며 마스크 위로 미간을 찡그렸다.

영화 ‘69세’의 한 장면. 사진제공|기린제작사


예명 ‘예수정’에 어머니 정애란의 향취가
40년 넘도록 연극배우로 살아왔고, 최근 10여년 동안 ‘도둑들’, ‘신과함께:죄와벌’ 등 영화와 ‘비밀의 숲’ 등 히트 드라마를 넘나든 예수정은 ‘69세’를 통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저력을 과시한다. 이미 출연 분량에 관계없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배우가 아닌가. ‘연기 DNA’로 꽉 찬 배우라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본명은 김수정. ‘예’라는 성씨는 어머니인 배우 정애란의 본명 ‘예대임’에서 따왔다. 2005년 작고한 정애란은 악극단에서 출발해 1950년대부터 영화에 출연해온 대배우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최불암 모친 역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예수정의 언니는 TBC 공채탤런트 출신 김수옥으로, 형부가 한진희이다.

예수정은 “내가 본 어머니는 늘 ‘쿨’ 하셨다”고 돌이켰다. “솔직하고 대범하셨다”고 덧붙이며 “어머니와 비슷해지길 원하지만 아직 그 경지에 가지는 못했다”며 웃었다.

그가 연기에 빠진 때는 대학교 1학년생 시절, 영화 ‘대부’를 보고 충격을 받고서다. 독일문화원 대학생 극회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한 딸을 어머니는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열정을 막지 못했다. 1983년 독일 뮌헨대 유학길에 오른 예수정은 연극학 석사 학위를 땄다.

“지금 제 나이는 소멸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연기를 더 배우고 싶어 (독일에)간 것이었는데 오히려 아이들과 보내는 삶이 좋아 만날 함께 놀았어요.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거실 마룻바닥을 닦을 때에도 충실해야 그 힘이 훗날 무대에 설 수 있는 다리 힘을 단단하게 해줄 거야! 그런 생각이었죠.”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양쪽 허벅지를 보여줬다. “겨울만 되면 마치 선수처럼 아이들과 스피드 스케이팅하며 살다시피 했다”면서 “그때 기른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연극을 할 수 있게 한다”며 웃었다. 그렇게 키운 딸이 연극연출가 김예나이다.

영화 ‘69세’의 한 장면. 사진제공|기린제작사



“늙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자”
예수정은 고집스레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지킨다. ‘백발’은 그를 상징한다. 내뱉는 단어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고 나긋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웬만해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이 나이가 되니 늙음도, 부족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예수정의 담백하고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연기는 영화 ‘69세’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69세의 주인공 효정은 물리치료를 위해 들른 병원에서 29세 간호조무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는다. 힘겹게 가해자를 고발하지만 오해와 편견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영화는 노년 여성이 세상에 맞서 존엄을 지켜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예수정은 “흔하지 않은 소재라 흥미로웠고,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며 “우리 사회의 소수 약자가 당한 수치스러운 일과, 그를 바라보는 편견을 자신의 방법으로 잘 헤쳐가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사회성을 담보한 작품에 마음이 동한다는 그에게 이번 영화는 노령사회에 대한 고민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도 반가웠다. ‘69세’라는 제목의 의미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세’자를 빼고 ‘69’라는 숫자만 본다면 함의가 많아요. 숫자에는 이미 ‘성별’을 상징하는 의미도 담겨 있죠. 감독이 왜 70세도, 68세도, 아닌 69세를 썼는지 이해할 만했어요. 69세는 주변 여러 가지를 거둬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를 찾는 작품은 끊이지 않는다. 이달 말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시청자와 만나고, 영화 ‘새해전야’ 개봉도 앞두고 있다.

“제 직업의 사명감이나 방향성은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주책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은 있죠. 내 삶에서 내 길을 흔들리지 않고 잘 찾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배우 예수정 프로필
▲ 1955년 3월25일생
▲ 1973년 고려대 독어독문학 입학·졸업
▲ 1979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데뷔
▲ 1983년 독일 뮌헨대 연극학 석사
▲ 연극 ‘하나코’ ‘신의 아그네스’ ‘리어왕’ ‘과부들’ 등 70여 편 소화
▲ 2005년 제41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
▲ 2001년 영화 ‘나비’ 시작, ‘도둑들’ ‘부산행’ ‘신과함께:죄와 벌’ ‘허스토리’ ‘말모이’ 등 출연
▲ 드라마 ‘공항 가는 길’ ‘피고인’ ‘비밀의 숲’ ‘마더’ ‘블랙독’ 등
▲ 2020년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및 영화 ‘새해전야’ 개봉 준비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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