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이동국.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한국축구의 한 시대를 수놓은 이동국(41·전북 현대)이 행복을 노래하며 올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새삼스러운 결정은 아니다. 언제든 훌쩍 떠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 언젠가는 찾아올 이별의 순간이 바로 지금일 뿐이다.
이동국은 영욕으로 점철된 축구인생을 걸어왔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해 K리그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그 해 생애 첫 월드컵 출전을 이뤘다. 프랑스월드컵을 지휘한 차범근 감독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육상선수 출신으로 스피드와 유연성을 갖춘 19세 유망주를 데려가기로 했다. 네덜란드와 조별리그 2차전은 0-5 참패로 끝났지만, 교체로 출전한 이동국의 통렬한 중거리 슛 한 방은 꽉 막힌 팬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임대이적한 베르더 브레멘(독일) 생활을 빠르게 청산할 정도로 욕심을 냈던 2002한일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많은 기동력을 강조하고 공격수의 수비력을 요구하는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정말 폐인처럼 지냈다.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 일상이었다. 현실도피를 위해 광주 상무(현 상주)에 입단했다. 선택이 옳았다. 상무에서 부활의 날갯짓을 한 그를 딕 아드보카트 감독(네덜란드)이 주목했다. 하지만 2006독일월드컵도 이동국을 피해갔다. 본선을 앞두고 치른 K리그 경기 도중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허망하게 꿈이 날아갔다.
허정무 감독(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이 한국축구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일군 2010남아공월드컵 때도 이동국은 허벅지 근육 파열로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아공 여정에 동행했지만, 불운은 이어졌다. 우루과이와 16강전 후반 막판 상대 골키퍼와 단독 찬스를 놓쳐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이동국의 끊임없는 도전은 충분히 위대했다. A매치 105회 출전은 역대 10위, 33골은 역대 공동 4위에 해당한다.

전북 이동국.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프로무대에서도 그는 당당했다. 친정팀 포항에서 활약도 돋보였지만, 전북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들즈브러(잉글랜드)에서 실패하고, K리그 복귀를 위해 택한 성남 일화(현 성남FC)에서도 6개월 만에 관계를 정리한 이동국은 최강희 감독(상하이 선화)을 만나 최고의 궁합을 과시했다.
“함께 우승을 만들자”며 다가온 최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동국이 녹색 유니폼을 입은 뒤 전북도 폭풍 성장했다. K리그 우승 7회(2009·2011·2014·2015·2017·2018·2019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우승 1회(2016년)를 일궈 명문 클럽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ACL 무대에서 대회 최다인 37골(75경기)을 몰아쳤다. K리그를 넘어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하는 이유다. FC서울에서 만개했고, 대구FC에서 활약 중인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골게터 데얀(몬테네그로)은 “이동국은 ‘리빙 레전드’다. 그를 볼 때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더 커진다”고 극찬했다.
살아있는 전설들이 충돌하는 흥미진진한 장면을 내년부터는 볼 수 없게 됐지만, 이동국이 남긴 클래스는 영원하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