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고스트] “동감이야”와 “51%의 사랑”

입력 2020-10-30 2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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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과 도예가의 죽음을 넘어 선 사랑 스토리
김진욱, 스마트한 외모·음색 … 기대되는 신세대 주역
7년 전과 또 달라진 아이비, 연기의 주름이 깊어져
박준면 오다 메, 우피 골드버그의 완벽 재해석
당신은 죽은 뒤에 가고 싶은 곳이 있는가. 누군가는 천국행 특급열차를 타고, 누군가는 극락으로 왕생하길 원하고, 또 누군가는 이도 저도 귀찮은 나머지 지옥으로 직행하고 싶어 할(설마!)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곳’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이라면 어떨까. 잠시만이라도, 진짜 가야할 곳으로 떠나기 전, 기차 플랫폼에 선 채 가혹할 정도로 짧은 작별인사를 나눌 정도의 시간만 허락된다고 해도, 죽기 5분전까지 밀어를 귓가에 속삭였던 그 사람의 곁이라면.

뮤지컬 ‘고스트’에서 샘 위트의 직업은 뉴욕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은행원이다. 은행원이라는 직군의 이미지 프레임을 샘도 딱히 벗어나지 않아 영혼의 존재보다는 숫자에 더 큰 신뢰를 보내는 쪽이다.

과학이 가져올 궁극의 미래를 그린 영화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브로마이드를 몰리의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소중히 지키는 남자. 집안의 빨간색 냉장고를 “콜라 자판기 같다”, 비대칭 디자인 소파에 대해서는 “만들다 만 것 같다”며 아티스트인 몰리의 취향을 밉지 않게 비꼬는 것도 그의 현실적인 면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급작스런 죽음이 몰고 온 충격은 샘의 가치관을 뿌리 채 제거해 버린다. 부정해 온 영혼 자체가 되어버린 샘은 연인 몰리 젠슨의 곁을 떠나지 않고 미처 못 다한 ‘작별’과 ‘복수’라는 과업을 충실히 이행한다.

‘고스트’는 영상미만으로도 뮤지컬 사(史)에 가로 획을 깊게 새길만한 작품이다. 뮤지컬을 ‘빛의 예술’의 반열에 올려 사진의 옆 자리에 앉혀 놓았다. ‘매지컬(Magical)’이라는 평가 역시 이 ‘빛’이 만들어 낸 작용의 한 갈래일 뿐이다.

김진욱(샘 위트)이란 배우를 처음 보았다. 주원, 김우형과 같은 뛰어난 선배 배우들과 당당히 샘에 캐스팅 되었다. 첫 느낌은 “와 키가 굉장히 크네”라는 것이었는데, 키가 눈에 띄게 커 몰리(아이비)는 물론 칼 브루너(김승대)마저 아담해 보일 정도였다.
주된 파트너는 박지연(몰리)으로 아이비 몰리와의 연기는 관람한 날이 처음이라고 했다. 어쨌든 김진욱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처음으로 아이비 몰리가 인형처럼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김진욱은 외모만큼이나 스마트한 느낌의 음색을 갖고 있어 엘리트 은행원 샘과 잘 맞았다. 영혼이 된 샘의 고통과 좌절, 분노의 표현이 젊고 싱싱해 조금도 눅눅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런 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2013년 초연 때 보았던 몰리도 아이비였다. 아이비는 기본적으로 청순한 음색을 소유하고 있는 배우다. 그를 댄스음악 가수로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 의아하게 여겨지겠지만, 아이비는 가수 시절부터 원래 리리시즘에 강한 쪽이었다. 음색 자체가 아름다운데다 가사의 전달력이 좋았는데, 이런 장점은 고스란히 뮤지컬로 옮겨와 이식되었고, 결과는 풍성한 수확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다 7년 전 몰리와는 확실히 또 달라졌다. 연기의 주름이 좀 더 깊어졌고 소리는 힘이 세졌다. 덕분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감정이란 음역의 폭이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영역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틀림없이 앞으로 보여 줄 캐릭터가 몇 개 더 늘어날 것이다.

박준면의 ‘오다 메 브라운’은 요즘 공연계의 화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오다 메’를 연기한 우피 골드버그도 박준면의 ‘오다 메’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준면은 우피 골드버그가 만들어 놓은 ‘오다 메’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도 완전히 새로운 매력 덩어리로 재해석해 놓았다.

오다 메가 샘의 영혼을 자신의 육신 안으로 받아들인 뒤 몰리와 추는 댄스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박준면이 연습실에서 ‘더 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다’는 이 장면에서 고조도의 조명이 객석을 향하고, 관객들이 시야를 잃는 짧은 시간을 틈타 오다 메와 샘이 자리를 바꾼다. 그리하여 오다 메와 교체한 샘이 몰리를 안고 춤을 추는 이 장면. 정말 멋진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죽음을 맞은 영혼이 가장 후회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음’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하지 못했음’이 아닐까.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다”고 말한다. 샘은 살아 있을 때 몰리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사랑한다”라는 말을 미처 해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한다.

샘은 몰리의 “사랑한다”는 말에 늘 “동감이야”라고 받아 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런 두 사람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넘버가 ‘Three Little Words’다. 3개의 작은 단어는 틀림없이 ‘I Love You’일 텐데, 공교롭게 우리말로도 ‘사랑해’ 세 글자다.



“거 참 사랑한다고 한 번 해주지” 싶은 관객의 마음에도 샘은 야속할 정도로 “동감이야”를 반복하는데, 원어(영어) 대본에는 ‘Ditto( ‘’ 위와 같음, 상동)’로 나와 있다. 간혹 ‘Me too’로 아는 분들이 계신 듯하여 밝혀둔다.

샘의 “동감이야”는 영화 ‘넘버3’에서 “내가 누군가를 51% 믿는다는 건 100% 믿는다는 뜻이야”라던 강도식(한석규 분)의 대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확실히 샘의 ‘동감’과 강도식의 ‘51%’는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그나저나 마지막 장면에 샘의 재등장은 꼭 필요했을까. 몰리와 오다 메와 작별인사를 (충분히) 나누고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 간 샘은 슬픔과 위로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앞에 다시 한 번 나타나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돌아선다. 마침표를 두 개 찍은 문장처럼 탁 걸려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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