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울력’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농산스님 “1cm² 칸 안에 글씨 쓰다보면 어느새 극락”

입력 2021-12-21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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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맹자·성경 신구약 66권까지
세필로 한자를 한 자 한 자씩 새겨넣어
60년간 매일 12시간씩 ‘수행이자 일상’

“손톱만한 공간? 잡념 지우면 커 보여
작품은 산처럼 쌓이고 보관 만만찮아
후세에 남길 좋은 인연 찾는게 내 바람”
“책은 오래 볼수록 자꾸 깊어져 맥을 알게 됩니다. 글(글씨)도 쓰게 되면 글의 이치와 사리를 저절로 터득하게 돼요.”

농산(農山·속명 이원식·77) 스님은 ‘서예 울력’을 통해 종교간 벽을 허물고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는 스님으로 유명하다. 그냥 ‘글씨’가 아니다. 스님은 가로 세로 1cm²의 공간에 세필로 한자를 한 자 한 자 새겨 넣는다.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지장경과 같은 불경뿐만 아니라 명심보감, 소학, 대학, 맹자 등 유교경전도 필사했다.

심지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신구약 66권도 썼다. 모두 한자다. 화엄경은 60만자, 성경은 130만자다. 130만자를 쓴 화선지 94장을 병풍으로 만들면 96폭, 길이는 100여 미터에 달한다. 완성하는 데에 몇 년씩 걸리는 극한의 작업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세필만이 아니다. 때론 대필로 화선지를 우주로 삼아 용이 승천하듯, 호랑이가 포효하듯 휘몰아치기도 한다.

농산 스님에게 글씨를 쓰는 일은 수행이자 일상이다. 스님은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 내가 해야 될 일이라 할 뿐”이라고 했다. 스님은 60여 년 동안이나 이 고된 작업을 통해 불력을 쌓아 왔다.


○ 획이 어긋나는 순간 ‘탁’ 터졌다

농산스님은 조부에게 한학을 배워 어려서부터 지필묵을 가까이 했다.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 데에는 ‘인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 여러 재주를 가진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누가 나보고 글씨를 써보라고 해서 쓰는데 쪼그맣게 쓰고 있으니 옆에 있던 사형이 ‘크게 써’ 하면서 나를 탁 때렸는데….”

붓이 흔들리면서 획이 어긋나는 순간, 스님 표현으로 ‘탁’ 터졌다. “그 이후 전에 쓰던 글은 못 쓰고 새로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 세계는 몰라요. 말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수행이라고 해도 손톱만한 칸 안에 한글보다 획수가 훨씬 많은 한자를 하루 종일 쓰는 일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작업이다. 그런데 스님의 말이 신묘하다.

“글을 쓰고 있으면 이 사각형이 점점 크게 보여요. 글씨를 쓰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죠.” ‘공이 수박 만하게 보였다’라던 전설적인 메이저리그 홈런타자의 말이 떠오른다.

정작 어려움은 다른 데에 있으니 바로 마음이다. 처음 마음과 끝의 마음이 동일해야 글자의 크기도 같을 수 있다. 잡념이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스님은 한 글자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쓴다.



○ 인연이 닿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농산스님의 제자인 해찬 스님은 “(농산)스님은 글을 쓰라고 하늘이 내리신 분”이라고 했다. 해찬 스님의 귀띔에 따르면 농산스님의 하루일과는 이렇다.

매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동네(경남 진주)를 한 바퀴 돌고나서 차 한 잔을 마신 뒤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대략 12시간쯤 걸린다. 작업은 새벽 2시나 되어야 끝난다. 작업 중에는 선승이 안거하듯 바깥출입을 끊고 ‘글자’라는 화두를 잡고 매진한다. 이쯤 되면 스님들이 겨울, 여름에 나는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가 아니라 ‘서안거(書安居)’다.

농산스님은 무욕,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한다. 스님은 “나랏돈으로 산다”며 웃었다.

스님은 해병대 출신으로 베트남 참전용사이다. 스님은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전기료 내고, 버스 타고, 종이와 묵(먹) 산다”고 했다.

해찬 스님은 신묘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스님께서 글을 쓰실 때 제자들, 신도들이 옆에서 볼 기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우리들 몸에서 기가 쫙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신기한 경험이죠.” 이 얘기를 듣던 농산스님은 “그럴 땐 글씨를 쓰면서 힘이 하나도 안 들지”라고 거들었다.

스님이 쓴 글자들은 모여 거대한 불탑을 이루기도 하고, 한반도가 되기도 한다. 대필로 휘날려 쓴 ‘용(龍)’은 당장이라도 몸통을 뒤틀며 승천할 듯 힘차다.

스님은 “어디로 가든 내 거처에는 늘 휘발유 여덟 통이 있다”고 했다. 언제라도 자신의 작품들을 남김없이 태워 없애버릴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무욕, 무소유의 스님다운 생각이지만 제자, 신도, 주변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인류 문화유산과 같은 스님의 글들이 세상에 공개돼 인연이 닿는 사람들의 집에, 일터에, 박물관에, 전시장에 남아 귀한 영향을 미치고 깨달음을 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스님의 지인들은 “인연이 생겨 작품이 팔리더라도 외국에는 절대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한번 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산스님은 인터뷰 말미에 극락에 대해 말을 꺼냈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극락도 죽음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다할 극(極)에 즐거울 락(樂). 삶을 다 했다는 뜻이다. 글자가 다를 뿐 열반이나 극락이나 맥락은 같은 것이다.

스님이 “하나 가져가시라”며 건네준 화선지에는 일필휘지로 ‘진심진실(眞心眞實)’이 쓰여 있었다. 참된 마음으로 행하면 참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글자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하여 영원한 즐거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님에겐, 글이 극락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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