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꾸는사람들]비보잉외길10년…‘틈’만나면춤췄다

입력 2008-04-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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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갬블러크루’의23살춤꾼신규상의독백
1997년 내 나이 열넷. 새 학교로 전학을 갔다. 모든 게 서먹하고 낯설다. 교실 뒤에서 모르는 친구들이 춤을 추는데 근사해 보였다. 햄버거를 사들고 다가가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그 뒤로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비보이가 됐다. 그 시절 친구들은 중간에 모두 접고 떠났지만, 난 10년 넘게 계속 이 길을 간다. 2000년 호기심 많던 열일곱, 비보이 고수가 되기 위해 목말랐다. 연습장 갈 돈도 없고, 그저 지하철 역사나 공원에서 춤을 췄다. 마천역과 천호역 역사가 내 아지트였다. 때마침 가까운 강동역에 비보이 최고수들이 연습한단 소문을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강동역으로 찾아갔다. 열 명 정도가 연습에 매진 중이었다. 또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들이 보여준 토마스(체조 동작의 안마 기술처럼 한 손을 땅에 짚고 계속 도는 동작)는 최고였다. “저도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제가 봤던 토마스 기술 좀 가르쳐 주십시오.” 무작정 그들에게 춤을 배웠다. 알고 보니 드림스라는 롯데월드 공연 전속 팀이었다. 2002년 열 아홉, 내가 동경하던 드림스에 들어갔다. 드림스 재결성 멤버로 들어오란 제안을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저녁 7시 반이 되면 롯데월드 무대 아래 섰다. 다른 유명 밴드가 무대에 오르면 그냥 바람잡이 역할만 했다. 사람들은 비보이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우리는 그저 흥을 돋우면 됐다. 그래도 즐거웠다. 스물을 앞둔 어느 날, 세계 대회 도전 기회를 얻었다. 프로젝트 팀을 결성 중이란다.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대회 ‘배틀오브더이어’에 한 번 나가고 해체하는 팀이라고 했다. 그 대회는 비보이 월드컵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울산, 광주… 각지에서 비보이 실력파들만 모였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댄스 배틀의 세계. 어쩌면 도박 같지만 우리는 춤에 인생을 걸기로 결정했다. 이름은 일명 도박사, ‘갬블러 크루’였다. 늘 새로운 도전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자고 외쳤다. 2002년 첫 도전, 우린 우승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끈끈한 우정과 추억으로 갬블러는 해체하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 2003년, 다시 재도전이 시작됐다.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연습했다. 낮에도 연습했다. 강행군은 계속됐다. 모두 오로지 춤에만 매달렸다. 바로 그 해 ‘배틀오브더이어’ 우승팀이 되기까지 우리는 갬블러를 지키고 비보잉을 국내외로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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