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엿보기]뮤지컬‘빨래’퍽퍽해진삶,팍팍삶아봐

입력 2008-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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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대학로 연극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할머니이자 서점직원, 슈퍼주인, 마을버스 운전사 등 ‘빨래’에서 1인 4역을 하는 이정은을 만나기 전, 대학로 연극 팬들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유니폼을 반듯하게 입은 서점직원에서 금방 보라색 슬리퍼를 질질 끈 할머니로 변신, 속사포로 대사를 쏟아내는 배우다. 관객들은 그를 보며 ‘와!’하고 놀랐다가 ‘깔깔깔’ 웃어재낀다. 나이를 종잡기도 어렵다. 8일 오후 6시30분,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연습이 한창이다. 코러스팀은 ‘(빨래를) 털털털 털어널어요’라며 흥얼거리고, “옆집 총각이었어?’라고 대사를 뱉는 희정 엄마(이미선)의 표정은 예사롭지 않다. “사이코 같다”며 극중 애인 구씨아저씨(김희창)가 이미선의 연기를 지켜본다. 객석에 앉아있던 추민주 연출가는 스포츠동아 8일자 신문을 보며 “이소연(한국 최초우주인)이라 좋아요”라며 환호를 보낸다. 분주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할머니 분장을 마친 이정은이 등장했다. 김희창은 “연기 인생 20년이다”라며 이정은을 추켜세운다. 이정은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8학번이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덕에 본래 나이보다 예닐곱 살은 밑으로 보인다. 극구 나이는 밝히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연기 인생 20년’의 압박이 머릿속에서 숫자를 세게 만든다. 97년 말 그가 경구형이라 칭한 설경구와 ‘지하철 1호선’에 출연했다. 지하철 1호선은 그가 출연한 첫 뮤지컬이다. 이정은은 연변처녀에게 먹음직스럽게 툭툭 순대를 썰어주던 후덕한 ‘곰보할매’로 나왔다. 할머니를 자주 맡아 어떠냐는 질문에 “좋다! 할머니가 됐든 뭐든 단역이라도 무대에만 나오면 다 좋다”며 흔쾌히 말한다. 이정은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 열성이다. 옛날에는 외적인 것만 제대로 표현하면 할머니 역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을 읽어내야 한다. 생각을 잡는 연기를 하고 싶다” 고 밝힌다. 2002년 ‘라이어’ 출연을 끝으로 2∼3년 간 연출도 했다. 배우 훈련을 통한 결과물을 내려던 시도였다. 액팅 코치로서의 ‘공연훈련 프로그램’이었는데 관객은 많이 안 찾았다고… “그 시절 말아먹은 이야기가 책(‘오지혜가 만난 이 시대의 쟁이들, 딴따라라서 좋다’)에도 나온다. 궁상맞다”고 크게 웃는다. 실제 책을 보면 이정은은 ‘천국의 배우’이자 ‘진실로 공부하는 프로’라고 묘사된다. 그는 배우가 잔재주 부리는 게 제일 싫다. 정직해야 한다고… ‘형사 같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배우는 범인이 어떤 동선을 그렸는가를 추적해 가듯,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단다. 연출하느라 배우로 ‘안 팔린’ 시기가 있기에 “불러주면 재깍재깍 간다”고 겸손한 너스레도 떤다. 연기의 롤모델이자 동료인 최광일과 작업실을 운영하는데 이젠 대학로의 땅값이 올라 아쉽단다. 92년, 93년… 포스터를 하루에 900장씩 붙이던 기억을 하면 대학로를 떠날 수 없다. 지금도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장진 연출 ‘매직타임’(98) 출연 시 아날로그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 선물한 팬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마흔의 아저씨였다는데… “나이가 드니 빨간색이 좋아!”, “이젠 체력이 안 된다니깐…” 할머니로 변신해 엄살을 피우지만 오지혜의 비유처럼 생동감 넘치는 ‘소년’ 같다. 오지혜는 이정은의 털털한 모습이 미래소년 코난 ‘포비’같다고 적었다. 그는 술잔에 연기 얘기만 오르면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최광일과 설전을 벌인다고 했다. 밤새 ‘정직한’ 연기를 고민하는 그, 이정은은 연기인생 20년, 대학로 사랑의 진정한 터주였다. 변인숙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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