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아빠의자랑스런딸될게요”

입력 2008-05-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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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근하신 아빠가 집에 오시자마자 갑자기 화를 내셨습니다. “너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뭐 한 거니?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저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저녁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욕실에서 씻고 나오신 아빠가 또 다시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집안 정리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면 좋잖아. 엄마가 바빠서 못 하면, 너라도 해 놓아야지. 화장실 바닥에 머리카락 좀 봐!” 하시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눈물만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아빠 너무 하신다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눈물이 그렇게 나는 겁니다. 저는 사실 2년 째 백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심지어 동생도 취직을 해서 회사에 나가는데, 저만 대학 졸업하고 2년 동안 이력서만 쓰고 있었습니다. 사실 집에 있으면서, 그동안은 아빠 말씀대로 열심히 청소도 하고, 퇴근해서 들어온 가족들 저녁도 차려주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면접이 있어서 꽤 바쁘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한 달 전에 이력서를 넣어두고 연락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회사였는데, 빈자리가 생겼으니 혹시 취직 전이면 한번 와보라고 연락을 해온 겁니다. 그래서 바쁘게 준비해서 기쁜 마음에 갔는데, 결과는 또 ‘꽝!’ 같이 면접 봤던 다른 사람이 됐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우울해서, 그 날은 미쳐 집을 치우지도 못 하고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눈치 보며 놀고 있는 거, 저도 정말 죄송한데… 저도 빨리 취직돼서 출근하고 싶은데…’ 아빠는 그런 제 심정을 조금도 헤아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는 것처럼 저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너무 너무 섭섭했습니다. 저녁상을 차릴 동안 아빠는 안방으로 들어가 계셨고, 마침 여동생이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얼른 상 차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봄이라고 해도 저녁 바람은 참 서늘했습니다.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뛰쳐나왔는데, 온몸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정말 차가웠습니다. 저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소리 내 펑펑 울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때, 저는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고, 잠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밤에 제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지도 못 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가족들 보기가 민망해서, 또 아침 일찍 집을 나왔습니다. 거리는 아직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며 제각기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전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는데… 할 수 없이 집 근처 공원에 혼자 앉아서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려고 휴대전화를 찾았는데, 주머니에 부스럭 하면서 종이가 만져졌습니다. ‘뭐지?’ 하고 꺼내봤더니, 만 원짜리 석 장과 두 번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이에는, ‘사랑하는 우리 큰딸에게’라고 시작하는 아빠의 편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는, ‘어제 아빠가 미안했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집에 있으면서 소심해져 가는 널 보는 게 속상해서 그런거야. 도대체 우리 딸이 어디가 못나서 집에만 있어야 하나. 거실에 네가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나더구나. 돈이야 지금 못 벌면 나중에 벌면 돼. 아빠는 우리 큰딸이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 돈으로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고 바람도 쐬고 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문득 지난 밤 제 이불을 덮어주고 간 사람이 어쩌면 아빠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뚝뚝한 성격에 투박한 말투를 쓰셔서 아빠가 제게 그렇게 마음을 많이 쓰고 계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빠의 진심을 오해하고 옹졸하게 굴었던 제 자신이 갑자기 너무 창피해졌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다시 기운 내서 이력서를 쓰고 있습니다. 이 중 하나는 꼭 희망을 몰고 와서, 꼭 아빠께 용돈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주 운암 | 김수영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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