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 별세…‘신의 아그네스’로 남은 1세대 연극 스타

21일 오전, 서울 대학로에서 엄수된 노제에서 예술인들이 고 윤석화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다 뉴시스

무대에 불이 꺼졌지만, 관객들은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1세대 연극 스타’로 불린 배우 윤석화가 19일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69세. 연극계에 따르면 윤석화는 19일 오전 9시 54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유족과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과 작별했다.

고인은 악성 뇌종양으로 투병해 왔다. 2022년 7월 연극 ‘햄릿’ 무대 이후 같은 해 10월 수술을 받았고, 투병 사실을 공개한 뒤 2023년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연극 ‘토카타’에 약 5분가량 우정 출연한 것이 마지막 무대가 됐다. 유족으로는 남편 김석기 전 중앙종합금융 대표와 아들, 딸이 있다.

윤석화는 한 시대의 공연예술을 움직인 인물이었다.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했다. 이후 ‘신의 아그네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스터 클래스’, ‘햄릿’ 등을 거치며 손숙, 박정자와 함께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는 연극 배우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이름 자체로 관객을 불러 모은 배우였다. 커피 CF에서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예요”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무대와 대중의 거리를 좁혔다.

윤석화는 생전 “무대에 서는 일은 늘 설레고 두려웠다”고 말하곤 했지만, 무대 위의 그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온 몸으로 보여준 배우였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에서 재즈 여가수 멜라니를 연기하며 1인극의 정수를 선보였다. ‘마스터 클래스’(1998)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의 삶과 고독을 긴 호흡으로 끌고 가며 연기의 새로운 세계를 관객에게 경험하게 했다. 2016년 ‘햄릿’에서 예순의 나이에 오필리아 역을 맡은 선택은 윤석화의 연기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든 장면으로 남았다.

그는 “틀렸다고 다시 할 수 없고, 예쁜 것만 편집해 보일 수도 없는 곳이 무대”라며 “그래서 연극은 가장 정직한 예술”이라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대사만큼 침묵의 무게를 중시했다.

뉴시스

윤석화는 연극 외의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1994), ‘명성황후’(1995),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2018) 등 장르를 오가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하지만 중심은 늘 무대였다. 병세가 악화한 뒤에도 연극을 향한 애정은 식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가 된 ‘토카타’ 출연 역시 그런 선택의 연장선이었다.

2002년 대학로에 그가 개관한 소극장 ‘정미소’는 젊은 연극인들이 새로운 작품을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윤석화는 직접 무대에 서는 배우이면서,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연극 제작과 연출에도 꾸준히 참여했고,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를 연출했다. 제작에 참여한 뮤지컬 ‘톱 해트’는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을 받았다.

1995년 종합엔터테인먼트사 돌꽃컴퍼니를 설립했고, 1999년에는 공연예술계 월간지 ‘객석’을 인수해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지만, 기록과 기억이 없으면 사라진다”고 말해왔다. 후배 배우들에게 윤석화는 ‘늘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였다.

화려한 주연만이 아니라 작품이 요구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았고, 단역이나 짧은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연극다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행인도 좋다”고 말하며 역할의 크기보다 작품이 지닌 의미를 먼저 봤다.

윤석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기록 이상의 기억이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의 기술보다 무대를 대하는 마음을 더 크고 깊이 남겼다. 배역에 관계없이 인물을 끝까지 책임졌고, 관객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 없어도 돌아가지만, 우리는 예술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습니다.”

21일 오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노제가 대학로 한예극장(옛 정미소극장) 마당에서 엄수됐다. 고인은 이날 용인공원 아너스톤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언젠가 다시 저 문을 열고 들어와 환한 미소와 함께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 것만 같다. 우리가 윤석화를 향한 박수를 언제까지고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