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일이랍니다. 그때 저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아내와 소위 필(feel)이 통해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스물 넷, 제 아내가 스물 하나였습니다.
보통은 한참 애인 만나 데이트하고 놀러 다닐 때, 저는 아내를 만나 아들까지 낳고,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처음엔 월세로 시작했던 저희 부부… 하지만 남들보다 먼저 결혼하고 산 덕에 지금은 아파트까지 장만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애기 아빠가 아니고 총각이었다면 아마 지금 제 나이에 내 집 장만은 꿈도 꾸지 못 했을 겁니다. 아직도 술에 빠져, 돈 한 푼 모아 놓지 않고 그렇게 흥청망청 살았을 겁니다. 그나마 처자식이 있으니 먹여 살려야 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일찍 정신 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들이 4살이 될 때까지 철이 없어서 아들한테 “아들아. 앞으로 어디 나가게 될 때는 아빠를 절대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대신 삼촌이라 불러라”이러면서 철저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아들이 4살이 됐을 때, 저는 겨우 스물여덟이었는데, 어딜 나가면 아들이 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게 그 때는 괜히 창피했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이가 몇인데 애기가 벌써 저렇게 컸나?” 하고 저를 다시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언제 결혼했냐?”며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싫고 창피했는지…
저는 매까지 들면서 아들을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과했는지, 아들은 집에서든 밖에서든 저만 보면 무조건 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네에서 애들하고 싸우다 들어온 날도 “삼촌∼ 친구들이 때렸어요∼” 하고 서럽게 우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어머니 댁에 갔을 때도, “삼촌∼ 이것 좀 해 주세요∼” 하고 저를 불러서, 저희 형들이나 어머니가 도대체 누구 삼촌을 부르는 거냐고 헷갈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저희 아들이 6살이 될 무렵 아들이 저희 부부 결혼식 사진을 봤는데, 왜 자기는 사진에 없냐고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얘기도 해주고, 옛날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웃었는데, 갑자기 아들이 제게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빠∼ 아빠는 왜 아빠보고 삼촌이라 부르라고 한 거야?” 그 순간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언제 적인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대답할 말이 따로 없어 꽤 진땀을 뺐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 아들, 얼마나 듬직하고 착한지 모릅니다. 한번은 놀다가 팔을 다친 적이 있는데, 엄마 아빠 걱정한다고 제대로 얘기도 안 하고 “그냥 놀다가 다쳤어요” 하면서 괜찮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고 며칠을 지냈는데, 아들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 아프다고 그랬습니다. 그 때서야 뭔가 잘못 되었구나 싶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X-ray를 찍어보고 팔이 빠졌다고 하는 겁니다.
남들이 들으면 부모가 되어서 참 무심하다고 하겠지만, 저는 정말이지 팔이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답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껄껄껄” 웃으셨습니다. “어찌 애가 이 정도가 되도록 가만히 있었느냐? 부모나 애나 똑같이 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 생각하며 웃지만, 그 때는 정말 웃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렇게 철없는 남편을 믿고 여태까지 함께 해 준 제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듬직한 제 아들도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제 인생에 없었다면 저는 지금처럼 살지 못 했을 겁니다. 이 모든 게 다 아내와 아들 덕분인 거 같습니다. “우리 아들∼ 그리고 여보야∼ 사랑해∼!!”
경북 김천|배정훈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