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서 챙긴 ‘형님 예산’ 정부가 깎았다

입력 2011-08-1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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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 의원 지역구 도로예산 집행과정서 삭감…
국회가 수정한 사업 980개중 212개 정부서 변경

2009년 말 국회를 통과한 2010년 정부 예산에는 울릉도 일주도로 건설을 위한 자금 20억 원이 끼어들었다. 정부안에는 없던 항목이었다. 경북 포항 영일만 산업단지 진입도로 건설 예산도 정부안보다 10억 원 증액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여서 ‘형님 예산’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국토해양부는 그해 울릉도 일주도로 건설에 5억 원만 썼다. 영일만 산업단지 진입도로 예산은 15억 원이 되레 깎였다.

국회가 예산 심의 과정에서 증액하거나 삭감한 예산 중 일부가 정부 부처의 집행 과정에서 원래 계획대로 되돌려지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국회 예산정책처의 ‘2010년 결산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회가 증액 및 감액한 980개 사업 중 212개 사업의 예산이 집행 과정에서 변경된 것으로 집계됐다. 국회가 늘리거나 신규로 반영한 예산 5192억 원의 84.5%인 4385억 원을 정부가 도로 깎았다. 또 국회가 삭감한 631억 원의 2.1배를 웃도는 1345억 원을 부처 내 다른 사업의 예산을 끌어와 복구했다.

정부 부처의 집행 앞에는 여야 실세도, 정치인 장관의 파워도 소용없었다. ‘지역구 예산’으로 의원 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지역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예산의 경우 증액분 2558억 원의 81.8%는 쓰이지 않았다.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었던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의 지역에 건설되는 풍각∼화양 간선도로 예산도 25억 원 증액됐지만 11억 원이 깎여 집행됐다. 국토부가 예산을 따온 뒤 완공 소요 위주로 재배정해 집행하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증액한 민생·복지 예산이 각 부처에서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도 많았다. 국회는 물가 인상을 감안해 장병 급식비를 정부안보다 50억 원 더 늘렸지만 국방부는 이를 군 사고처리와 군 비행장 소음피해 배상금 지급에 지출했다.

정부는 국회가 우선순위를 둔 특정 사업 예산을 돌려 자체 중점사업에 투입하기도 했다. 국회는 해군력 증강을 위해 전투함인 광개토-Ⅲ급, 잠수함인 장보고-Ⅱ급 도입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에 241억 원을 증액했다. 하지만 방위사업청은 이를 공군력 증강을 위해 ‘하늘의 지휘소’로 불리는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사업에 썼다.

국회가 시급성이 떨어진다며 삭감한 예산을 정부가 되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유해물질 안전관리를 위한 연구 예산 50억 원 중 국회가 삭감한 8000만 원을 집행 과정에서 타 사업의 예산을 끌어와 되살렸다.

예산정책처는 “국회가 증액, 삭감한 예산에 대해 정부 부처가 예산 집행 과정에서 변경하는 것은 국회의 예산 심의·확정권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회가 무리하게 정부 사업 예산을 깎아가며 지역구, 선심성 예산을 끼워 넣은 결과라는 비판도 나온다. 숙명여대 정치행정학부 박재창 교수는 “국회가 실력자 순으로 ‘곳간 빼먹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공정한 예산 심의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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