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신태용과 이란축구, 그리고 21년 묵은 빚

입력 2017-08-29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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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표팀 신태용 감독. 스포츠동아DB

기자가 처음 이란에 축구취재를 간 때는 17년 전인 2000년 여름이었다.

2000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LG배 이란 4개국 초청대회’에 출전한 허정무 감독의 한국대표팀을 동행 취재했다. 처음 가본 곳이 대개 그러하듯 이란이라는 낯선 곳이 전해준 새로움은 지금도 선연할 정도로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서울에 테헤란로가 있듯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고, 한국산 브랜드의 자동차와 에어컨이 왜 그리 많이 눈에 띄던지 은근히 자부심도 생겼다.

아자디스타디움의 웅장함과 경기장의 위치가 해발 1200m의 고지대라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이란이 지리적으로는 중동에 위치하고 종교적으로 이슬람권이지만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민족적으로 아랍국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더 깊이 이해했다.

모두 괜찮은 기억만 남은 건 아니다. 자존심을 긁힌 장면도 생각한다.

공항과 숙소, 경기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면 어김없이 손가락으로‘6’과 ‘2’를 표시하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대표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의미를 알아챘다. 한국축구를 조롱했던 것이다.

내용은 1996년 12월 UAE 두바이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전 이야기였다.

한국은 이란에 2-6으로 졌는데, 4년이 지난 뒤에도 그들은 그걸 자랑삼아 손가락으로 상대를 놀리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 1996년 한국과의 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6-2 대승을 이끈 알리 다에이. 사진제공|AFC


한국은 김도훈의 선제골과 신태용의 추가골로 전반을 2-1로 앞섰지만 후반에 이란의 축구 스타 알리 다에이에게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역전패를 당했다. 한국축구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축구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박종환 감독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전력이 비슷한 팀끼리의 대결에서 6골이나 먹었으니 할말은 없게 됐지만 그래도 그 한 경기를 가지고 몇 년을 우려먹는 걸 보면 이란 팬들이 꽤나 신이 났긴 났던 모양이다.

신태용은 당시 A매치 21번째 경기에서 3번째 골을 기록했지만 무참한 패배로 빛이 바랬다. 더욱 안타까운 건 20대 중반의 신태용이 그 시절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영남대를 졸업한 1992년 일화(현 성남)에 입단해 그 해 K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성남이 1993~1995년 K리그 3연패를 달성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1995년 K리그 MVP, 1996년 K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미드필더가 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골 감각이 탁월했다.

선수 시절 신태용. 스포츠동아DB


1996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도 기여했다. 축구인들은 신태용의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극찬했다. 명석한 두뇌회전과 탁월한 기량으로 ‘그라운드의 여우’는 그렇게 성장해갔다. 당연히 대표팀에도 발탁됐다.

대표팀에서 폭발만 해준다면 한국축구를 이끌 에이스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K리그 최고의 선수는 대표팀에만 가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존재감이 없었다. 특히‘두바이 쇼크’는 그의 축구인생 항로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이란에 치욕을 당한 뒤 한국은 감독교체와 함께 대폭적인 물갈이 작업에 들어갔다. 신태용도 그 물결에 휩쓸리며 사라져갔다. 1997년 친선경기에 2차례 더 나섰을 뿐 더 이상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었다. 당연히 월드컵 출전도 남의 얘기가 됐다.

통산 A매치 23경기 출전에 3골이 전부다.

만약이지만 아시안컵에서 이란을 이기고 신태용의 골이 결승골로 빛을 발했다면 그의 축구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원래 기량이 뛰어났으니 특유의 자신감과 주위의 따뜻한 시선만 보태졌다면 단언컨대 신태용은 대표팀에서도 폭풍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란 팬들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조롱한 것은 2013년 6월 18일 울산에서 열린 2014브라질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추태를 보인 이란대표팀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의 주먹감자와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그날 1-0으로 이긴 케이로스는 최강희 감독이 지킨 한국 벤치를 향해 주먹감자를 날리며 도발했는데, 상대를 얕잡아보는 듯한 건방진 행동은 팬이나 감독이나 매 한가지였다.

신태용은 코치 시절인 2016년 10월에 이란에 패했다. 이쯤 되면 신태용 감독이 8월 31일 열리는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전을 반드시 이겨야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개인적인 설욕은 1차적이다.

지난 2013년 한국을 1-0으로 꺾고 세리머니를 펼친 이란.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더 중요한 9회 연속 진출을 위한 월드컵 티켓이 걸려 있다. 이란에 단 한골도 넣지 못한 채 4연패 중인 한국축구의 자존심도 살려야한다. 가라앉은 한국축구의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라도 승리는 꼭 필요하다. 승리를 통해 새로운 스타도 발굴해야한다. 상암에 모일 6만 관중에게도 선물을 안겨야한다. 이것 말고도 꼽을 이유는 더 많다. 이번에 설욕하지 못하면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할 지 모른다. 그래서 더 절박하다.

신 감독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21일 소집 기자회견에서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이란에 진 빚을 시원하게 갚고 싶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중요성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축구는 자제할 것이다. 큰 스코어로 꺾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겨서 본선에 나가는 게 우선이다. 내 욕심은 잠시 접겠다. 꼭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신 감독은 누구보다 이번 한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손가락 조롱도, 주먹감자의 추태도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되갚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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