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감독 “119분 잘 뛰고 1분 못버틴 아이들…얼마나 괴로웠을까”

입력 2018-01-3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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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오른쪽)과 이영진 수석코치. 사진제공 | 디제이매니지먼트

▶박항서 감독

체격이 왜소한거지 체력 약한게 아니야
아이들의 선입관을 깬 것이 고무적이죠

▶이영진 수석코치

어마어마한 환영 인파…상상도 못했죠
아이들에겐 딱 한번의 계기가 필요했다


우리가 이렇게 베트남에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베트남 축구가 만든 기적에 아시아가 깜짝 놀랐다. 베트남의 젊은 선수들은 27일 중국에서 끝난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축구 약소국의 선전에 국내 팬들은 아낌없는 갈채와 환호를 보내줬다.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중심에 한국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박항서(59) 감독과 이영진(55) 수석코치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아름다운 드라마를 완성했다. 베트남 A대표팀과 U-23 대표팀 통합 코칭스태프에 부임한지 3개월여. 낯선 문화와 환경에 적응할 틈도 없이 소화한 첫 무대를 훌륭히 장식한 둘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우리 U-23 대표팀의 부진이 겹친 영향도 컸으나 베트남의 선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스토리였다. 귀국 후 베트남 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받고 성대한 카퍼레이드를 경험하며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낸 박 감독과 이 코치의 육성을 대화체로 풀어봤다.

악천 후에도 베트남 U-23 전사들은 당당했다. 비록 우즈베키스탄에 밀려 2018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에 그쳤지만 위대한 도전에 모두가 찬사를 보낸다. 사진제공|AFC



● 우즈베키스탄 결승전


박항서(이하 박)=아이고, 감기몸살이 대단하네.


이영진(이하 이)=중국 날씨가 워낙 추웠고 결승전 때는 내내 폭설까지 내렸잖아요. 갑자기 긴장이 풀렸고, 무더운 하노이로 다시 이동했으니 몸살이 날 수 밖에요.

박=많이 웃을 수 없었지. (우즈베키스탄전) 119 분을 잘 뛰고 마지막 1분을 버티지 못했으니. 우리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잘 달래주셨잖아요. 다시 일어서자고 격려하시고. 아이들은 충분히 즐겼을 겁니다. 축구가 뭔지, 축구의 묘미가 어떤 것인지 이제 확실하게 깨우치지 않았을까요.

박=그렇게 혹독한 날씨에 경기를 강행한 AFC에 전혀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어. 이것 또한 축구인데. 또 다른 목표가 생겼으니 발전을 기대할 만 하네. (박 감독은 연장 후반 종료직전 결승골을 내준 뒤 울먹이는 제자들을 향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 당장 일어나 팬들에게 다가가라”고 지시했다. 패배의 쓰라림은 잊어서는 안 되지만 지금의 성과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코멘트였다.)

이=U-23 선수들에게도 크게 다가오겠지만 전 연령대 선수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봐요. 동기부여라고 할까. 자신을 되돌아보고 채찍질하는 계기를 열어주지 않겠어요.

박=나도 아주 낮은 곳까지 내려갔던 사람이지. 절박했고, 간절했어. 모두가 마음을 읽어준 것 같아. 우리 선수들도 전부 간절했잖아. 끈끈하게 뭉쳤어. 이게 바로 팀 정신이지.

이=저 또한 비슷한 입장이었잖아요. 이심전심이죠. 진심으로 대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분위기가 엄청날 줄이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베트남 열기

박=실감할 수 없었지. 언론 보도를 접할 기회도 틈도 많지 않았고, 그저 하루살이처럼 오늘에만 매진해야 했으니.

이=베트남이 미쳤더라고요. 축구사랑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 정도는 상상도 못했어요. 어마어마한 환영인파라니.

(폭설로 귀국 항공편이 연착되고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느라 중국 숙소를 떠난 지 13시간 만에 하노이 호텔에 도착한 박 감독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물론 기쁘지 않고,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사랑과 관심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임을 잘 알고 있어서다.)

박=어찌 하다보니 훈장까지 받았고, 축전도 받아 얼떨떨한데 이번 대회로 국민적 기대치가 많이 올라가 많이 부담스러워.

이=아이들이 껍질을 깨고 나왔잖아요. 실력이 업그레이드됐고, 자신감이 쌓였으니 엄청난 자신감으로 바뀔 겁니다.

박=그렇지. 선입관을 깬 것이 고무적이야. 처음 훈련을 해보니 스스로 굴레를 씌우고 있더라고. ‘난 체력이 약해!’라고. 사실은 체격이 왜소한 거지, 체력은 좋거든. 이걸 깨주고 싶었어.

이=그렇죠. 아이들에게 딱 한 번의 계기가 필요했죠. 이미 더욱 좋은 축구를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던 거죠.

헹가레 받는 박항서 감독. 사진제공|AFC



● 해답은 팀

박=호주를 깨면서 자신감이 붙었어. 과거 이런저런 대회에서 호주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조별리그 2차전을 승리하며 흐름을 탔어. 아이들이 팀과 자신에 대한 의문이 완벽하고 온전한 신뢰로 바뀐 거지.

이=전술적인 이해도도 빨랐어요. 시간낭비가 없었죠. 준비시간이 아무래도 짧다보니 뒷문을 단단히 하는 게 우선이었죠. 다만 수비를 위한 수비축구가 아니라 공격을 위한 수비강화를 주문했는데, 전부 잘 수행했어요.

박=그렇지. 우리의 믿을 구석은 팀이었잖아. 항상 전략적으로 다가설 수밖에. 포메이션을 바꾸고 수비라인을 탄탄하게 하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어.

이=정신무장도 단단했어요. 8강전을 준비할 때부터 감독님이 아이들에게 전달한 메시지 기억하세요? ‘나와 동료만이 아닌, 가족과 조국을 위해 뛰자’는 내용.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벽도 많이 낮아졌죠.

박=마냥 편하진 않았겠지만 최대한 다가섰어. 장난치고 농담 거는 걸 꼭 소통이라고 볼 수 없겠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시간이 흐를수록 느꼈어.

이=환경도 좋아졌어요. 부족함도 있지만 국내 클럽에 버금가는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니 선수들이 믿고 따랐던 것 같아요. 진심이 모두를 춤을 추게 한 거죠.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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