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스타 조성민,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 진출 요미우리 에이스 ‘영광도 잠시’

입력 2013-01-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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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은 신일고 시절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각광을 받은 뒤 고려대 졸업 후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리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요리우리 입단식에서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의 조성민. 스포츠동아DB

팔꿈치 부상 재기 실패…한화 깜짝 입단도

1973년 4월5일 서울에서 태어난 조성민은 신일고 시절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당시 서울 지역 고졸 투수 지명권을 가졌던 LG와 OB가 각각 임선동(휘문고)과 손경수(경기고)를 1차지명했던 것도 조성민의 야구인생에 행운처럼 여겨졌다. 고려대에 입학한 뒤, 일본 프로야구의 요미우리로 이적하는데 그 어떤 걸림돌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3학년 시절인 1994년 국가대표로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이끌었고, 1995년 아시아선수권에서 1996애틀랜타 올림픽 티켓을 따내자 미국, 일본 스카우트들이 달려들었다. 1996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조성민은 이례적인 8년 장기계약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계약금만 무려 1억5000만 엔에 달했다.

그러나 탄탄대로만 있을 줄 알았던 조성민의 야구인생은 요미우리 입단 이후부터 험난해졌다. 1997년 7월 1군으로 올라왔고, 8월 5일 야쿠르트전에서 데뷔 첫 승을 따냈다. 마무리로 활약하며 1997년 첫해 1승2패 11세이브, 방어율 2.89의 호성적을 올렸다.

선발로 전환한 1998년엔 전반기에만 7승6패를 거뒀고, 요미우리 에이스로 떠오르며 올스타에 뽑혔다. 그러나 올스타전 2차전에서 2이닝 무실점을 기록할 때, 팔꿈치를 무리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1999년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았고, 이후 재기를 위한 기나긴 투쟁을 벌였으나 끝내 승리하지 못했다. 2002년 10월 요미우리에서 퇴단할 때까지 실제 조성민이 던진 시즌은 4년밖에 되질 않았다. 통산 성적은 11승10패 10세이브, 방어율 2.84였다.

2000년 10월에 톱스타인 고(故) 최진실과 결혼해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으나 불화를 거듭하다 2004년 9월 이혼했다. 제빵사업은 실패했고, 2003∼2004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 한국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렸지만 좌절됐다. 그러다 2005년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에 깜짝 입단해 2007년까지 3년 동안 35경기에 출장해 3승4패 방어율 5.09를 남기고 은퇴했다.

이후 방송해설자와 에이전트 사업에도 뛰어들었다가 2011년 두산의 부름을 받고, 2군 코치로 새출발했다. 2012시즌 후 재계약이 불발된 뒤 방송해설 복귀를 노렸으나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2013년 1월5일 밤,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故 조성민은?

▲1973년 4월5일생
▲둔촌초∼신일중∼신일고∼고려대
▲1996년 요미우리 입단∼2002년 퇴단∼2005년 한화 입단∼2007년 퇴단∼2011년 두산 2군 재활코치∼2012년 12월 재계약 포기 퇴단
▲일본프로야구 통산 성적=11승10패 10세이브 방어율 2.84
▲한국프로야구 통산 성적=3승4패 방어율 5.09


김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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