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정“한방에못끝내금따고도아쉬웠죠”

입력 2008-11-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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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나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다 베이징올림픽 기간, 한 중국기자는 임수정을 ‘나비’같다고 표현했다. 중의적인 의미였다. 투기종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곱상한 외모. 하지만 매트 위에서는 마치 날갯짓을 하듯 가볍게 공중발차기를 작렬시킨다. 올림픽이후 많아진 팬들. 그 중에는 스토커처럼 임수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언니 뒤에 숨어버리는 가녀린 나비가 된다. 발차기 한방이면 될 것을…. 임수정은 “경기장 밖에서는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며칠 쉬면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탓에 허공에 대고 날랜 발차기를 해본 게 전부다. 하지만 도복을 입으면, 호랑이 문양의 맹수 같은 나비가 된다. “지더라도 화끈하게! 지저분한 승리는 싫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 7월 초, 태릉에서 만난 임수정은 “비장의 무기를 연마하고 있다”며 웃었다. 석 달 뒤에야 공개한 비기(秘技)는 ‘걸고 뒤차기 상단.’ 얼굴을 가격하는 일종의 이단차기다. “한 방 맞으면 간다”고 했다. 그것은 임수정에게 하나의 이데아였다. 임수정식 태권도의 표상. ○기술은 의식이 아니라 몸이 불러낸다 임수정은 경기가 잘 풀리는 날이면 환청을 듣는다. 2007방콕하계유니버시아드 때처럼. 당시 결승전 상대는 홈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고 있던 태국선수였다. 임수정의 왼발은 준결승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타일랜드(Thailand)’라는 4음절 응원소리가 ‘대한민국’으로 들렸다. 엉뚱한 상상력 덕에 기적처럼 솟아오른 힘. 한쪽 다리로만 싸운 경기였지만 8-1로 이겼다. 관중들의 박자에 춤추다보니 마지막에는 왼발차기도 절로 들어갔다. 베이징에서도 내내 그랬다. 어떤 응원 소리도 매트에 서는 순간, 임수정의 것이었다. 임수정은 “과도하게 몰입하다 보니 신기(神氣)가 생기는 것 같다”며 웃었다. 하지만 신기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평소 모험심이 많은 임수정은 1골을 잃고, 2골을 넣는 스타일. 하지만 올림픽 때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기(秘技)는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상황. 아직은 이론의 형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임수정은 “기술은 의식이 아니라 몸이 불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연마했다면….” 한 방에 보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흰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대신 이론과 경험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2년 간 더 도복을 입은 뒤에는 선수시절의 문제의식들을 본격적으로 체계화시킬 생각. 물론, “운동을 하는 동안 만큼은 최고의 자리에 서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수정의 모교 경희대는 석·박사 과정의 장학금을 약속했다. 임수정도 후배들을 위해 9월 모교 발전기금 1000만원을 쾌척. 가장 관심 있는 연구 분야는 운동생리학이다. 태권도의 체력훈련은 일반적인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 임수정은 평소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2분 3회전을 뛸 수 있는 힘이 충분한데도 무리한 체력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체력담당트레이너가 따로 있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민첩성과 유연성, 근력 등 태권도에 필요한 요소들만을 모은 체력훈련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상 요인들도 모두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장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는 임수정이 체력관련공부에 목이 말라 있었다는 것이 한국태권도의 현주소를 말하고 있었다. 임수정이 빼어난 발차기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타자’ 이승엽(32·요미우리 자이언츠)과 마찬가지로 ‘동체시력(動體視力)’이 좋기 때문이다. 야구에서의 타자와 마찬가지로 태권도는 정지한 사물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동체시력은 일반적인 정지시력과는 무관하다. 임수정은 “태권도 선수들의 동체시력을 향상시키는 방법도 정리해보고 싶다”고 했다. 발차기 만큼이나 공부에도 욕심이 많았다. “힘들지는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학문은 잘 모르는 게 사실입니다. 바다처럼 배울 게 많겠지요. 하지만 두렵지는 않아요. 일단, 저에게는 선수시절의 경험이 있으니까요.” 문득,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가 떠올랐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던. 이제 겨우 스물두살. 흰 도복을 벗고도, 날아갈 꿈에 부푼 임수정이 딱 그랬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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