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만난사람]서세원·서정희의‘완벽한딸’서동주

입력 2009-01-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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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튼스쿨서박사과정밟아…악바리10년“나이트한번안갔어요”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의 이모 집을 방문했다. 엄마, 아빠가 이왕 온 김에 미국학교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했다. 페이 스쿨의 드넓은 운동장에서 햇살을 받으며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딸은 생각했다. ‘아, 미국 애들은 매일 운동장에서 놀기만 하는구나. 나도 공부 걱정 안 하고 놀면서 학교를 다녔으면 ….’ 한국으로 돌아온 딸은 아빠와 마주 앉았다. 유학을 보내달라고 3개월 간 부모와 막무가내 투쟁을 벌여 온 딸이었다. 아빠는 딸과 아들 앞에서 엄숙히 입을 열었다. “어리지만 나는 너희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단 조건이 있다. 아빠는 외화 낭비하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반에서 1등! 학교에서 1등! 그리고 고등학교도 대학도 최고로 좋은 곳에 진학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안 가면 된다.” 딸과 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결심한 딸이 아빠에게 말했다. “알았어, 아빠.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성적표 보여 달라고 하지 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은 메사추세츠 페이 스쿨, 세인트 폴 스쿨, 웰슬리대, MIT를 거쳐 지난해 미국 최고의 경영대학원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MIT와 와튼 스쿨이야 재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페이 스쿨은 미국 최고의 전통을 지닌 명문교, 웰슬리대는 힐러리 클린턴이 나온 학교다. 웰슬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다 MIT로 옮겨 순수수학을 전공했다. 와튼 스쿨에서는 석사과정을 생략한 채 박사과정에 합격해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딸과 아빠는 10년 전의 약속을 지켰다. 딸의 이름은 서동주(26). 아빠는 개그맨이자 연예기획자 서세원 씨였다. 엄마는 CF모델과 연기인으로 유명했던 서정희 씨. 남동생은 가수 미로이다. 서동주 씨는 자신의 유학생활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묶어 지난해 ‘동주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책 속에는 20대 여성 특유의 감성어린 글과 본인이 직접 찍고 그린 사진, 그림들이 담겨 있다.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귀국한 서동주 씨를 만났다. 근황을 물으니 첫 마디가 “휴학계를 내려고요”해서 놀랐다. “여러 이유가 있어요. 공부에 조금은 지친 점도 있고요. 하고 싶었던 사진도 해보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사회생활 경험을 쌓아보려고 해요.” 기업에서 컨설팅 일을 해보고 싶단다. 사실 대학원에 가기 전 미국에서 금융 관련 회사에 원서를 냈다가 와튼 스쿨에 합격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돌아와 한국기업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 ‘공부 잘 하는 비법’에 대한 컨설팅을 더 잘 할 것 같은데요? “하하! 주변에서 많이들 물어보세요. 사실 공부 잘 하는 비법이 어디 있겠어요? 오직 단순무식하게 하는 거죠.” - 너무 교과서적인 답변 같은데요? “음 … 목표를 크게 잡는 게 중요해요. ‘나는 이런 대학 가야지’, ‘이 대학원 가야지’ 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거죠. 목표가 커야 중도에 실패해도 또 도전할 힘이 생기거든요.” - MIT에서 수학을 전공했지요. 수학 잘 하는 비결이 있을까요? “수학문제를 봤다? 모르는 게 있다? 한 10분 보다가 모르면 넘어가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비슷한 문제유형을 찾아본다든가 하면서 1시간이건 2시간이건 붙들고 늘어져요. 답을 보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죠. 수학은 한 시간 동안 100문제를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시간에 한 문제를 풀더라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해요.” 서동주 씨는 미국에서도 발로 뛰는 한국식 공부법이 통했다고 했다. 혼자서 해결이 안 되면 거침없이 교수실 방문을 두드렸다. - 두드렸더니 열렸군요? “참 많이 찾아 갔어요. 교수님한테 여쭤봐서 이해를 했는데 집에 오면 또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아요. 창피를 무릅쓰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찾아가는 거죠. 한국사람 특유의 끈기! 물건 하나를 팔 때 거절당했다고 금방 물러서지 않잖아요? 거절당하면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그러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결국 ‘얘기라도 들어 봅시다’하게 되는 거죠.” - 유학생활에 대해 ‘낭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만? “예전에 어떤 분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자식이 전교에서 100명 중 95등을 하는 수준인데, 외국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거였죠. 글쎄요, 아마도 스스로 새로운 목표가 생기거나 의지가 없다면 그 아이는 어딜 가도 95등이 아닐까 싶어요. 영어만 해도 그렇죠. 한국에 있었을 때 영어 공부가 잘 안 됐다면, 가서도 생각보다는 잘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본인의 유학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죠? “학비만큼은 스스로 벌려고 했죠. 남들 하는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어요. 학교식당에서 일 하고 과외도 하고. 나중에 경험이 좀 쌓이고 나서는 교수님 밑에서 인턴을 했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는 밥 사 먹을 돈까지 떨어졌을 때도 있었죠. 3개월 동안 두유와 오트밀만 먹고 산 적도 있었어요.” - 예원중학교 때는 피아노, 웰슬리에서는 미술, MIT에서 수학을 했다가 지금은 와튼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죠? 무슨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사실 제 성격이 변덕이 심해요. 아빠랑 비슷하죠. 호기심이 많고.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애니어그램 테스트를 해보니까 모험가 타입으로 나오더라고요. 활동적이고 다 좋은데 끈기가 없다는 거죠. 한 가지에 정착을 못 해요. 그래서 스스로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죠. 뭐든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다른 걸 하려고 하죠.” - 유명 부모님을 둬서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많겠죠? “어릴 때, 어디 가면 사람들이 아빠를 알아보고 뭐 하나라도 더 주실 때 좋았죠. 그런데 조금 커서는 아무래도 행동에 신경이 많이 쓰이게 되죠. ‘누구누구 딸이 어디서 뭐 하고 놀더라’ 이런 시선들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잘 안 믿는데, 사실 전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이란 곳을 한 번도 안 가봤어요. 미국에서는 더 했죠. 가뜩이나 아빠가 힘드신데, 안 좋은 소문이 아빠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좋은 점이었네요?” - 어머니 서정희 씨가 자녀 교육에 굉장히 열성적이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유학가기 전까지는요. 초등학교 때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깨우셔서 피아노를 치게 하셨죠. 어디서 잠에 취해서도 완벽한 연주가 가능했다던 유명 피아니스트의 일화를 들으신 거예요. 밥 먹는 동안에도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줄 때마다 문제집에 나온 문제를 읽고 답하게 하셨을 정도였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뒤 펑펑 울던 딸을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혀놓고 “그까짓 개가 중요해, 피아노가 중요해!”하고 무섭게 소리치던 엄마였다. 그런 맹훈련 덕에 초등·중학교 시절에는 전국 콩쿠르에서 1등도 꽤 해봤다. 그러던 엄마였지만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겪으며 ‘이유 없는 반항’에 열중하던 딸 앞에서 엄마가 선언했다. “이제 앞으로 공부하란 소리 안 할 테니까 이제부터는 동주 네가 알아서 스스로 해.” 엄마는 지금까지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딸이 섭섭해 할 정도이다. 엄마는 잔소리 대신 딸을 위해 조용히, 그리고 쉼 없이 기도를 할 뿐이다. - 2002년 아버지가 조세포탈, 뇌물 혐의 사건에 연루되면서 많이 힘들었죠? “대학교 입학할 때였어요. 월드컵이 열린 해였고, 여름이었죠. 아빠가 일 얘기는 거의 하지 않으시는 편이어서 우리는 잘 몰랐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가족이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어야 했다는 거였죠(당시 서세원 씨는 혼자 외국에 나가 있었다). 엄마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거든요. 출장을 가셔도 아빠가 엄마를 꼭 데리고 가시고. 학생이라 엄마, 아빠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게 슬펐죠. 결국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MIT로 옮긴 거였고요.” 엄마, 아빠도 몰랐던 사실 하나. 세상 모두가 범법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하던 시절, 서동주 씨는 학교 근처 약국에 들러 물 한 병과 수면제 2통을 샀다. 수면제 한 통 60알을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렸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지금 어디야!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친구 신디였다. 서 씨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건 아니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채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알약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변기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달려 온 친구의 품에 안겨 서씨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결코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동주 씨가 사인을 해 건낸 자신의 책 ‘동주 이야기’의 앞머리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난 평범하지만, 내가 이룬 것들은 특별하다. 이름난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얻기 위해 내가 쏟은 노력과 희생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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