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렌트’오리지널팀의도쿄공연…좌절하는청춘들,그아름다운절규

입력 2009-08-24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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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렌트팀의 공연 모습. 가운데 맨 앞에서 열창하고 있는 배우가 마크 역의 앤서니 랩이다. 이제 더 이상 이들의 무대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사진제공|뉴벤처엔터테인먼트

평일입석까지초만원열기후끈…‘초연배우’파스칼·랩에반가움의박수
일본 도쿄의 아카사카 ACT 시어터는 1300석의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대형 극장이었다.

평일인 데다 직장인에게는 다소 이르다 싶은 저녁 7시 공연(한국은 평일의 경우 8시공연이 많음)이었지만 관객석은 그야말로 초만원.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맨 뒷자리 입석도 꽉꽉 들어찼다. 입석도 나름 자리가 정해져 있어 아무 데나 설 수 없다니 과연 일본이구나 싶다.

한 금발의 사내가 무대로 걸어 나오면서 공연이 시작됐다. 두 명의 주역 중 한 명이자, 내레이션을 맡아 극 전반을 끌어가는 마크(앤서니 랩·39)다. 그저 걸어 나와 비디오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인데 관중석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연에 대한 관중의 반가움의 표현이자 예우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역시 금발의, 훤칠하고 후리후리한 남자가 나오더니 전기기타를 집어 들었다. 다시 한 번 박수. 로저의 애덤 파스칼(38)이다.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의 냄새를 애써 찾을 이유는 없다. 아주 굵은 뼈대와 설정만을 살짝 빌려왔을 뿐이다. 에이즈와 동성애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만 결국 렌트는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추위를 쫓기 위해 악보를 찢어 불쏘시개로 던지는 아픈 장면은 라 보엠에서 빌려 온 유일한 신일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건물에 살고 있는 동병상련의 청춘들은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삶을 하루하루 연명해갈 뿐이다.

죽기 전에(HIV 양성반응자다) 명곡 하나 쓰는 게 소원인 뮤지션 로저. 영화 제작자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제 정신’을 갖고 사는 마크. 밤무대 댄서로 에이즈에 약물중독까지 겹친, 그러나 너무나도 섹시한 로저의 연인 미미(렉시 로손). 컴퓨터 천재이자 로저와 마찬가지로 HIV 양성반응자 콜린스(마이클 맥엘로이). 거리의 드러머로 결국 에이즈로 죽게 되는 게이인 엔젤(저스틴 존스톤). 공익변호사로 레즈비언인 조앤(하니파 우드). 행위 예술가이며 한때 마크의 연인이었지만 레즈비언이 되어 조앤과 사랑에 빠지는 모린(니콜렛 하트) 등이 렌트의 핵심 인물들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청춘들이 52만 5600분의 시간, 즉 1년이란 시간을 위해 사랑하고 기억하자고 목 놓아 부르는 저 유명한 ‘사랑의 계절(Seasons of Love)’, 로저와의 첫 만남에서 미미가 부르는 ‘촛불을 켜줘요(Light my Candle)’, 로저와 미미의 이중창 ‘당신 없이는(Without you)’, 마크의 ‘할로윈(Hollowin)’, 로저가 죽어가는 미미를 안고 부르는 ‘당신의 눈(Your eyes)’.

삶은 구질구질하지만 2시간에 걸쳐 쏟아지는 33곡의 노래는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다. 좌절한 젊음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다.

절규는 가슴을 찌르지만 어느덧 눈가가 시큰거린다.

오리지널 공연이기에 영어로 노래하지만 언어는 결코 장벽이 되지 않는다. 노래의 심연 속에 감추어진 짙은 감성을 드러낼 권능은 가사에 있지 않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무형질의 감성이 손에 쥐어질 것만 같다.

오직, 오리지널만이 가진 힘이다. 권능이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사진처럼 눈에 박아, 뇌 속에서 현상과 인화를 해버리고 싶었다. ‘빠름’과 ‘빠름’ 속에 끼워 넣은 ‘느림’의 미학은 또한 얼마나 감미로웠던가. 전직 로커출신 애덤 파스칼의 노래는 그가 든 텔레케스터 기타처럼 카랑카랑하면서도 힘차게 뻗었다. 비음이 살짝 섞인 앤서니 랩의 음색은 ‘랩의 목소리에 맞춰 곡을 썼다’던 요절한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의 의도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었다.

뇌쇄적인 모습으로 2층 난간에 등장해 부르던 미미의 ‘Out Tonight’를 보고 들으며 관객은 숨조차 아꼈다(특히 남자들!).

이번 렌트가 단순히 ‘외국배우가 출연하고, 원어로 노래되기에’ 오리지널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다. 애덤 파스칼과 앤서니 랩은 1996년 초연 무대의 주역들이다. 초연을 하루 앞두고 대동맥혈전으로 급사한 작곡가 조나단 라슨과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다.라슨은 오디션을 통해 이들을 직접 뽑았고, 이들의 음역과 음색에 맞춰 곡을 썼다. 랩의 ‘할로윈’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 역시 라슨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누리고 있는 렌트의 영광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파한다. 그의 음악을 전 세계에 전할 의무감도 느낀다.라슨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배우들의 연습 부족, 미비한 무대설비로 사실상 렌트 첫 공연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예술 감독은 공연을 취소하려 했지만 배우들이 강행을 고집했다. 고민 끝에 춤 없이 그냥 노래만 하기로 했다. 1막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노래만 하던 배우들은 천천히 연기를 시작했고 춤을 추었다. 앤서니 랩은 “정말 놀라우면서도 엉망진창이었다. 무조건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울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공연이 끝나고, 한 동안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 외쳤다.

“고마워요! 라슨!” 극장에 ‘고마워요! 라슨’의 합창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렌트 신화의 시작이었다.

오리지널 렌트는 지난해 8월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리며 사실상 12년간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동안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휩쓸며 3억3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렌트-헤드’로 불리는 열성적인 팬들은 수십 번씩 공연장을 찾아, 배우들이 관객을 알아볼 정도가 됐다.

오리지널 렌트 팀은 일본투어에 이어 한국을 찾는다. 이들의 마지막 해외투어다. 로저의 ‘원 송 글로리’, 랩의 ‘할로윈’을 더 이상 파스칼과 랩의 육성으로 들을 수 없다는 얘기다. 오리지널 렌트팀의 한국공연은 9월 8일부터 20일까지 딱 12일간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다. 이날 밤 오리지널 팀의 공연은 기자의 심장을 통째로 ‘렌트’해 가버렸다. 공연이 끝난 뒤 찌꺼기처럼 남은 공허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돌려받아야 할 텐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렌트가 남긴 여운은 깊고, 짙고, 죽음처럼 길었으니까.

9월8일-9월20일|여의도 KBS홀|문의 1544-1681

렌트 공식 홈페이지 www.rent-broadway.co.kr

도쿄 |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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