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 러브 스테이지] 5.18 광주의 상처, 달달하게 치유하다

입력 2014-05-23 0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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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연극 ‘푸르른 날에’. 2011년 초연 때는 사전 예매율이 저조했지만 평단, 언론, 관객의 ‘삼위일체 호평’이 쏟아지며 한국연극의 대표적인 흥행작이 됐다. 사진제공|신시컴퍼니

■ 연극 ‘푸르른 날에’

작품성으로 한국 대표흥행작 등극
낯간지러우면서 과장된 톤 대사들
무거운 이야기를 밝게 만드는 감초


‘아픔’은 ‘슬픔’이 되고, ‘슬픔’이 ‘깊음’을 얻으면 ‘기쁨’이 남는다.

연극 ‘푸르른 날에’를 보면서 든 생각 한 조각이다.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아픔이요 고통이었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픔을 아픔으로, 고통을 고통으로만 풀지 않았다. 분명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사람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연극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배우들의 대사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대사의 톤. 과장되고 심지어 어색하기까지 하다. 5.18의 상처를 잊기 위해 스님이 된 여산(김학선 분), 그의 연인으로 여산의 아이를 가진 정혜(정재은 분), 여산의 형 오진호(정승길 분), 과거의 여산인 오민호(이명행 분), 과거의 정혜(조윤미 분), 여산과 정혜의 딸 오운화(채윤서 분) 등 배우들의 대사는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 절묘하다. 게다가 대사들도 근사하기 짝이 없다.

“아, 저기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윤정혜!(정혜)”

“저기 저 남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구나!(여산)”

“비록 지금은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이런 낯간지러운 대사와 과장된 톤이 쓰디 쓴 아메리카노에 살짝 떨군 단 시럽 같은 맛을 낸다. 아프지만 덕분에 달달한 아픔이 되었다. 관객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면서 입으로 웃는다.


● 초연 사전예매 120석…‘삼위일체’ 호평 받으며 흥행대표작 등극

작품이 좋으면 배우들도 신이 난다. 보고 있으면 배우들이 얼마나 이 작품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는지 30분도 안 돼 느낄 수 있다. 이영석(일정 역), 정재은(정혜 역)같은 베테랑 배우들조차 까마득한 후배들과 함께 기본 발성연습부터 참여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남산예술센터와 공동제작을 맡은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는 “4년 동안 매년 무대에 올리면서 같은 배우, 같은 스태프로 공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 지금은 한국연극의 대표 흥행작이 되었지만, 2011년 초연 때는 사전 예매율이 저조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딱 120장이 팔렸다.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푸르른 날에’의 작품성은 관객들이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평단, 언론, 관객의 ‘삼위일체 호평’ 이 쏟아졌다. 막을 내릴 때는 80%의 객석점유율을 과시했고, 2012년과 2013년 공연은 전회매진을 기록했다.

관람을 위한 팁을 드린다. 여산스님의 스승인 일정의 대사에 귀를 기울일 것. 한 마디 한 마디가 깨알같은 삶의 지혜다. 랩처럼 빠르게 내뱉으니 집중해야 한다.

오민호의 물고문 신은 이 작품에서 가장 무거운 장면이다. ‘과연, 이명행이다’ 싶은 명연기이니 숨을 죽이고 감상해야 한다. 이번에 처음 투입된 오운화 역의 채윤서는 연예가중계 리포터, 밴드 이브닝글로우의 보컬리스트로도 친숙한 배우다. 6월8일까지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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