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황정민의흥겨운유혹…뮤지컬‘나인’

입력 2008-01-24 09: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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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무대 한가운데 놓여 있는 빈 침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서 바람둥이 천재 영화감독 귀도는 아내 루이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머릿속엔 딴생각으로 가득하다. 요염한 정부 칼라의 육감적인 모습. 상상 속 칼라는 어느새 무대에 등장해 귀도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이어 귀도가 과거 영화 배역을 준다고 유혹해 잠자리를 했던 옛날 그녀들도 하나씩 나와 무대 위 침대로 뛰어오른다.》 “귀도, 내 사랑” “귀도는 내 이상형” “내가 꿈에 그리던 남자….” 침대에 가득해진 여자들의 대사가 서로 겹쳐지며 소음이 되는 순간, 귀도는 침대 위로 올라가 지휘봉을 꺼내 휘두른다. 15명의 여자들은 지휘봉에 따라 첫 곡을 합창한다. “랄랄랄라랄랄라….” 귀도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를 한 무대에 펼쳐 놓은 뮤지컬 ‘나인’의 이 첫 장면은 이후 2시간 반(중간 휴식 포함) 동안 펼쳐질 이 작품의 성격을 한눈에 보여준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반 자전적 영화인 ‘8 1/2’을 원작으로 한 ‘나인’은 남자 배우라면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이다. 딱 한 명의 남자 배우가 15명의 여배우와 출연하는 이 작품은 남자 배우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중요하다. 브로드웨이에서 1982년 초연된 뒤 2003년 리메이크 공연에서는 할리우드 스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라이선스 버전으로 선보이면서 배우 황정민의 4년 만의 뮤지컬 복귀작으로 일찌감치 관심을 끌었다. 그의 출연 소식만으로 1차 티켓 판매분 중 황정민이 출연하는 날의 좌석은 거의 다 팔린 상태. 아홉 살짜리 아이 같은 면을 지닌 마흔 살 남자 귀도의 캐릭터는 연기하는 배우도 힘들지만 관객이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환상과 현실이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하는 형식이나 플롯도 명쾌하진 않다. 황정민의 팬이라면 진지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선에서 균형을 잡은 그의 연기와 노래, 그리고 춤을 눈앞에서 보는 즐거움은 있겠지만 강렬한 카리스마로 객석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1막 후반부 귀도와 여성 영화제작자가 탱고를 추는 대목은 브로드웨이에서는 “반데라스와 여배우 치타 리베라의 탱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티켓 값이 아깝지 않다”는 평을 들었던 명장면이다. 황정민의 탱고는 섹시하기보다 귀여운 쪽이지만 역시 공연 중 가장 큰 박수가 쏟아진다. 황정민은 귀도의 어린아이 같은 측면은 잘 표현했지만, 카사노바 같은 이미지는 약했다. ‘지킬 앤드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 완성도 높은 작품을 통해 호평을 받아온 미국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은 이 작품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품의 콘셉트를 잘 살리지 못했다. 배경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 채 공연 내내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적인 대형 세트도 비효율적이었고 더욱 현대적인, 단순한 무대가 아쉬웠다. 칼라 역의 정선아는 비교적 캐릭터를 잘 살렸으나 지난해 더 뮤지컬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루이자 역의 김선영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3월 2일까지. LG아트센터. 1588-5212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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