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못친다는명품직구‘닥터봉’신화는계속된다

입력 2008-06-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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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식 웨이트트레이닝 “효과 만점” 지난해 시즌 종료 후 그는 뒤늦게 미국식 방법을 버리고 한국식 훈련 스타일을 택했다.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 미국에선 가볍게, 가끔씩 했지만 12월 마무리훈련 때부터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소화했다. “예전에도 웨이트를 안 한게 아니지만 지난 겨울에는 ‘내 한계다. 더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강도를 조금씩 더 높였다. 미국에서 했던 것보다 무겁게 하면서 횟수도 늘렸는데 이것이 볼 스피드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즌이 한창이지만 아직까지 어깨가 무겁거나 그런 느낌이 한번도 없다. 마치 스프링캠프에서 볼을 던지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말이다. ○ “성급할 필요있나요”…승수 안나와도 만족 올 시즌 잘 던지고도 승수를 보태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는 “충분히,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즌 초반 한화 정민철을 만나 “아쉽고 힘들다”고 털어놓았을 때, 선배의 답은 명쾌했다. “한달에 2승씩만 해도 12승이다. 성급하게 마음 먹지 마라.” 그랬다. 더 큰 목표는 위에 있지만 지금은 착실히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내는 게 우선임을 알고 있어서다. ○ “내 자신감 원천은 144㎞ 몸쪽 직구” 20일 롯데전. 1-1 동점이던 6회초 2사 2루서 상대 4번 이대호와 만났다. 볼 카운트 2-3. 심호흡을 한 뒤 힘차게 볼을 뿌렸고 이대호는 멍하니 보고 있다 스탠딩삼진으로 물러났다. 시속 144km짜리 몸쪽 직구. 바로 그 볼이다.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들어오는 꽉 찬 직구. “다른 팀 형들이 그런다. 알고도 못 치겠다고. 그런 말을 한두번 들으니까 자신감으로 이어지더라. 다른 팀 타자들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되고. 그래서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ML서 6승 올렸던 2003년, 그 느낌을 찾아서 빅리그 2년차이던 2003년. 애틀랜타 소속이던 그는 불펜으로만 44게임에 등판, 6승2패 방어율 5.05를 기록했다. 빅리그서 통산 7승을 거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해일 수밖에 없다. 2008년, 봉중근이 지금도 2003년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그래서다. 지난해보다 올 시즌 5km 정도 구속이 빨라졌지만 평균 구속이 150km에 못 미치는 그는 “무엇보다 직구 평균 구속이 150km가 나왔고 커브 각도도 지금 보다 나았다. 그 때 기분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 내 인생을 바꾼 WBC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태어나서 처음 달아본 성인대표팀 태극마크의 느낌은 특별했다. 한국 동료들과 8년 만에 함께 뛴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고 기쁨이었다. 특히 한국말을 하며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감동이었다. (구)대성이형, (손)민한이형, (박)명환이형과 함께 한국말을 쓰며 운동을 하면서 결심했다. “그래, 한국으로 간다.” 누가 들으면 우스꽝스러운 이유일지 모르지만 그에겐 그랬다. 길고 어려웠던 미국 생활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 감동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신인지명을 통해 2006년 5월 LG 유니폼을 입고 한국에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 정교한 한국야구,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용병투수들이 이야기하듯 한국 프로야구 타자들은 만만하지 않다. “정교하고 무엇보다 배트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공을 많이 보고, 유인구에 잘 속지 않는다.” 한국이 그리워서 한국 마운드에 섰지만 투수로선 더 힘든 길에 들어선 느낌. 그러나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 “못다이룬 ML꿈 7년뒤 재도전 생각 있죠”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왔기에. 그래서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게 되는 7년 후 서른 네 살때, 다시 한번 미국이나 일본에 도전하고싶은 욕심도 있다. 물론 한국 최고의 투수로 굳게 자리매김하는 게 우선 목표다.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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