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여고시절진빚이제갚을게”

입력 2008-07-17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저희 남편은 동네에서 조그마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1년이 넘게 남편에게서 생활비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지는 벌써 6년째, 몇 년 전부터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 현상소 때문에 손님들이 줄어서 보증금마저 까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계약만료까지는 앞으로 10개월이 남았습니다. 혹시나 싶어 사진관을 부동산에 내놓고, 벌써 6개월을 기다려봤지만, 보러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대로 가게가 안 나갈까봐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남편에게 선뜻 생활비 달라는 말을 하지 못 하고, 제가 직접 아르바이트를 나가게 됐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에 배달을 하려고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여자 분이 “너 혹시 미경이 아니니?” 하고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누군가하고 봤더니, 제 고등학교 동창 유진이었습니다. 고 3때 같은 반으로 꽤 친했습니다, 유진이는 대학을 가고, 저는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더 솔직히 말을 하면, 유진이는 제게 계속 연락을 하려고 했고, 제가 자격지심 때문에 일부러 그 연락을 피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저희 두 사람! 서로의 모양새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습지 교사를 하고 있다는 유진이는 무거운 책을 들고 수업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택배 여러 개를 들고 주소를 보며, 배달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수업이 끝난 후 유진이는 제게 연락을 해 왔고, 저희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일찍 집에 가서 집 정리를 좀 하고 싶었지만, 택배가 많아서 집안 꼴이 엉망인 그대로 유진이를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진이는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 앉아 저랑 오랜만에 차 한 잔하며 사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보통 친구들이 자기 사는 얘기하면서, 좋지 않는 건 쏙 빼고 얘기하는데 유진이는 모든 얘기를 다 해줬습니다. 유진이는 지금 시댁에서 살고 있는데, 시부모님이 아들 둘을 돌봐주고 계신다고 합니다.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월급이 많지 않아 그걸로 생활이 어려워 학습지 교사 일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차도 없어서 버스로 돌아다니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력 한만큼 월급은 나온다며 밝게 웃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긍정적인 성격은 여전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저도 제 사정 얘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남편은 사진관 하는데 먹고 살만해” 이 정도로만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 관리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 관리실인데요∼ 어떤 아주머니가 물건 맡겨놓고 갔어요. 좀 많은데 챙겨가세요.” 택배도 아니고 물건이라니 이상해서 남편하고 같이 내려가 봤습니다. 빨래 건조대, 쌀 20Kg, 행주, 화장지, 과일까지 살림살이가 한 묶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앞으로 남겨진 쪽지 한 장. “미경아. 고등학교 때 기억나니? 3학년 때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그 때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소풍 때 김밥을 미쳐 못 싸갔었어. 그 때 네가 두 개를 싸와서 아무도 모르게 내 가방에 살짝 넣어줬잖아. 난 그 날 학교 오기 전까지 김밥이 없어서, 어떻게 점심때 친구들을 피해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는데… 너는 오히려 내가 상처받을까봐 미안해하면서, 엄마가 여러 개 싸줘서 주는 거라고 둘러댔었어. 난 그 기억이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있단다. 이건 그 때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해줘” 하고 적혀있습니다. 유진이는 저희 집에 있던 30분 동안 저희 집 세간살이를 꼼꼼히 봤던 모양입니다. 다 부서져서 제가 청테이프로 칭칭 감아놓은 빨래 건조대며, 구멍 뚫린 행주하며, 몇 개 안 남은 화장지까지… 유진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저 역시도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소풍 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유진이 부모님 소식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유진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앞으로 이 친구와 자주 만나서 서로 위로 받고, 의지하며 사이좋게 지내야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저도 제 얘기를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놔야겠습니다. 제게는 참 따뜻하고 소중한 제 친구입니다. 제주 서귀포|김미경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