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더라도링에서죽겠습니다”복싱백종섭기관지파열…눈물의8강기권

입력 2008-08-19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죽더라도 링 위에서 쓰러지게 해주십시오.” 단 한 번도 대든 적 없던 백종섭(28·충남체육회)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복싱대표팀 천인호 감독도 결연한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종섭아, 미안하다. 너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천 감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백종섭은 이내 참았던 눈물을 토해냈다. 이훈 코치도 “술독에라도 빠지고 싶다”며 울먹였다. 한국의 주먹들은 그렇게 베이징을 적셨다.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한 올림픽이었다. 항상 국제대회 8강에서 탈락한 징크스도 모두 날릴 채비였다. 한 경기만 이기면 동메달. 백종섭에게 8강전은 삶을 송두리 채 걸어도 아깝지 않은 경기였다. 충남체육회에서 받는 넉넉치 않은 월급은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딸의 병원비로 다 나간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결혼식도 미뤘다. 모 실업팀은 1000만원 이상의 웃돈을 얹어 준다며 스카우트에 나섰지만 소속팀과 지도자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충남체고 동기인 태권도 선수출신 아내는 “돈 보다 신의가 먼저인 남편이 멋지다”며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백종섭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아내에게 멋진 결혼식을 바치고 싶다”고 말해왔다. 생계 때문에 미뤄온 군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불운은 2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지역예선에서 잉태됐다. 경기가 끝나자 가슴이 답답했다. 처음에는 그냥 체한 줄로만 알았다. 휴식을 취하자 통증이 사라졌고, 다시금 샌드백을 두들겼다. 하지만 완쾌된 것이 아니었다. 15일 우승후보 피차이 사요타(태국)와의 16강전. 주먹 한대가 백종섭의 목에 꽂혔다. 경기는 이겼지만 기쁨도 잠시. 속이 울렁거렸다. 6개월 전과 똑 같은 느낌이었다. “제발, 아니기를….” 백종섭의 기도에도 하늘은 무심했다. 컴퓨터단층활영(CT)결과 “기관지가 찢어져 공기가 식도를 누르고 있다”고 했다. 깍두기 하나 삼키기도 어려웠다. 한국병원까지 촬영결과를 보냈지만 “공기가 기도까지 막을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복싱연맹은 18일 밤, 3시간 가까운 마라톤회의 끝에 기권을 결정했다. 메달을 위해 선수의 생명을 걸 수는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백종섭이 눈가를 훔치며 핸드폰을 열었다. 지옥 같은 카자흐스탄 전지훈련에서도, 숨이 막히는 태백 고지대 훈련에서도 유일한 위안이 되던 민주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민주야, 자랑스러운 아빠가 못돼 미안하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사진 속 민주는 연신 방긋거렸다. 메달 약속을 못 지킨 아빠의 눈은 다시금 촉촉해졌다. 소속팀 정해만 감독은 “이제 종섭이가 군복무를 하는 동안 민주의 병원비는 누가 댈지 걱정”이라며 고개를 묻었다. 베이징=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