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여신김연아세계를홀리다

입력 2008-10-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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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그랑프리1차대회시즌첫우승…공중3회전등완벽…4개대회연속1위
여신은 길고, 가녀린 팔로 이야기의 장막을 열어 젖혔다. 순간, 관객은 천일야화를 듣는 왕이 됐다. 부정(不貞)한 왕비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세상 모든 여성을 죽이려했던 아라비아의 왕. 빙판 위에는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가는 연약한 여인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녀의 의상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이었다. 빙판 위의 세헤자라데는 간절함을 표현하려는 듯 손목과 팔의 움직임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마치 1001일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되찾은 왕처럼, 4분간의 손길은 어떤 악한 마음을 먹은 인간의 내면도 치유하고 있었다. 전날처럼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공중 연속 3회전)을 성공시켰지만 경기장은 고요했다. 그만큼 흠뻑 빠져있다는 증거였다. 연기가 끝난 뒤의 갈채. 그것은 관객이 받은 뜨거운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전 날의 연기가 악녀적인 연기와 검은색으로 죽음을 표현한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김연아(18·군포수리고)가 27일(한국시간)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 컴캐스트 아레나에서 열린 2008-2009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 ‘스케이트 아메리카’ 여자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23.95점(1위)을 얻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69.50점)을 합산한 점수는 193.45점. 최근 열린 그랑프리시리즈 4개 대회 연속 우승이었다. 2위 나가노 유카리(일본·172.53점)와는 무려 20.92점 차.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자라데’는 동양적인 선을 표현하기에 용이해 요정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0세계선수권에서 이토 미도리(39·일본), 2002동계올림픽에서 미셸 콴(28·미국), 2007세계선수권에서 안도 미키(21·일본) 등 세계정상급 동양계 선수들의 연기에 쓰였다. 여자선수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미도리는 분명 뛰어난 점프를 선보였다. 하지만 점프 ‘머신’이라는 한계는 세헤자라데에서도 드러났다. 왕과 교감하며 왕을 홀리기 보다는 혼자서 재잘대는 느낌이었다. 비교적 콴이 풍부한 연기를 펼치며 천진난만한 사랑스러움을 표현했지만 그녀에게는 비애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간절한 이야기를 펼치는 세헤자라데와 연기 내내 떠나지 않는 미소는 어울리지 않았다. 김연아는 이날 배경음악에서 웅장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 왕의 주제 앞부분을 과감하게 제외했다. 다른 선수들이 기교를 위해 전체 연기를 고려하지 않고, 삽입한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 결과 김연아는 왕의 마음을 치유하고 목숨을 지켜낸, 가녀리지만 강인한 여인 세헤자라데로 다시 태어났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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