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지효는 두터운 감수성의 옷을 입고 있었다.
“촬영장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주위를 맴도는 공기가 내 살갗에 닿아 부딪힐 때면, 가을이나 겨울 혹은 봄날의 아침햇살을 맞을 때면 지나간 사랑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송지효의 커다란 눈망울에 잠시 처연한 빛이 스쳤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쌍화점’(감독 유하·제작 오퍼스픽쳐스) 속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미처 감당하지 못할 사랑에 빠져드는 왕후의 눈빛이었다.
송지효는 “한강의 물결 위로 비치는 햇살과 바람, 사람들이 보이면 나도 한때 그 햇살과 바람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하는 상념에 젖는다”면서 처연한 눈빛을 내보인다.
짙은 감수성의 옷은 ‘쌍화점’에 부딪혀 조금씩 벗겨졌다. 두텁기만 했던 그녀의 감수성은 한동안 처절할 정도로 깨어져 나갔음직하다. 그 두께와 짙은 채도 만큼 심성의 상처도 컸을까. 유하 감독으로부터 “네가 과대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던 터였다.
송지효는 “나를 깨뜨려 버리게 했다. 그리고 나를 다시 알게 해줬다”고 말한다.
외부에 비쳐 창피하기보다는 스스로에 화가 났다. 스트레스의 강도도 더해졌다. 정답은 따로 있지 않았다. 결국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것을 알았고 “내 안에서 부대끼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레 과정을 지나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순간순간을 지나며 더욱 짙은 감수성의 옷으로 갈아입은 듯했다.
“노출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지만 솔직히 정말로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클로즈업이 많아 변화의 감정을 잡아내는 게 더 중요했고 힘들었다.”
-굉장히 힘겨웠나보다.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고통을 이겨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왜 했을까. ‘그래도 할 수 있잖아’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고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쌍화점’은 어떤 이야기인가.
“지독한 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주진모)과 호위무사(조인성) 그리고 왕후가 파국으로 치달아갈 때 가슴이 아픈 느낌이랄까, 뭉클했다. 그런 애잔한 감정이 남아 있다. 그런 애잔함을 관객도 안아갔으면 좋겠다.”
-애잔함이라. 애잔한 사랑의 기억이 있나.
“한 번 정도 경험해봤던 것 같다. 내후년이면 나이 서른이다. 그런 감정이 없었을까. 연기를 하면서 또 영화가 완성된 뒤 사랑에 관한 연상이 이어지기도 했다. 불같이 설레고 떨리는 게 사랑일까, 오래도록 만나는 게 사랑일까.”
-혹여 무엇을 기록하는 편인가.
“비가 오면 그 느낌, 그 기억, 그 때 흐르던 음악, 그리고 상황 같은 걸 끄적거린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에 부딪쳐오는 빗소리와 음악, 웅성이는 사람들 소리. 모두가 뒤섞여 정겨운 느낌을 준다. 가령 그런 느낌을 적는 거다.”
-혼자 덩그러나 앉아 뭘 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드라마 ‘궁’ 이전의 시간은 고통이었다. ‘내게 왜 이런 시간이 주어졌을까’ 생각했다. 심지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낯선 곳, 낯선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성격 탓에 일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송지효는 ‘쌍화점’에 캐스팅되던 때 들었던 유하 감독의 농담을 전했다. “내가 성형수술을 안한 게 큰 축복이라는 말을 하셨다”고.
송지효는 “처음엔 정말 열심히 하겠지만 잘하겠다는 말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 ‘쌍화점’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선 배우가 뽑아낼 수 있는 혹은 그 길로 가는 최대의 성실성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건 순전히 그녀의 ‘욕심’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코 드러내지 않지만 짙고 두터운 감수성의 옷 속에 감춰둔 ‘욕심’으로서 송지효는 관객을 만나려나보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