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배우&소주방사장변신전프로야구선수최익성

입력 2009-01-21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SK



ȭ


불굴의저니맨,연기·사업‘희망의허슬’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로야구 8개구단 중 두산과 롯데만 빼고 6개 구단에 호적을 올린 사나이. 연습생으로 시작해 은퇴까지 포함하면 7번이나 보따리를 싸는 고단한 야구인생을 산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부터인가 ‘저니맨(journey man)’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5개 팀을 옮겨다닌 이광길 이동수 동봉철의 전설적인 기록을 깨고 프로야구 사상 최다팀, 최다이적의 신기록을 작성한 ‘오뚝이’ 최익성(37). 2005년 SK 방출을 끝으로 받아주는 팀이 없었으니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지 4년째가 됐다. 그러나 은퇴를 거부하고 도전을 이어가던 그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고 그가 다시 테스트를 받고 그라운드에 설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난해 배우로 데뷔한다는 깜짝 소식을 전해온 그가 최근 서울 신사동에서 소주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이젠 그를 미치게 만들었던 야구에서 벗어난 것일까. 죽도록 사랑했던 그라운드가 아닌 새로운 인생의 무대에서 다시 연습생으로 출발하는 그는 어떤 모습일까. ○소주방 사장님으로 변신하다 도산대로 옆에 있는 시네시티를 끼고 돌아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로 향하는 길목에 ‘꼬추’라는 붉은색 간판이 눈에 띄었다. 분주한 저녁시간. 소주방에는 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시끌벅적했다. “오랜 만이네요.”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깔끔한 옷맵시며, 멋스러운 헤어스타일이 과거 투사 같던 최익성이 아니었다. “야구를 그만둔 뒤 첫 사업이라면 사업이지만 제가 이걸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사실 야구하는 선후배들에게 소주방 한다는 얘기도 잘 안했어요. 입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많이 와야 좋죠. 제가 연락해서 사람 데리고 오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맛이 없으면 한번 오고 안 오죠. 그동안 제가 잘 살았다면 ‘익성이 보러 가자’, ‘익성이형 보러 가자’면서 오겠죠.” 오랫동안 절친하게 지내던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 후배 2명이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해 사회생활도 경험할 겸 3개월 전부터 시작한 소주방. 주방과 아르바이트를 합쳐 종업원 10명을 두고 있다. 손님들 중엔 연예인과 연예계 관계자들도 꽤 많았다. 이날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고 미국에 갔다 돌아온 롯데 최향남이 방문했고, 얼마 전에는 요미우리 이승엽과 주니치 이병규도 차례로 다녀갔다. ○20-20클럽 연습생 신화, 그리고 방랑과 도전 심줄이 불거지는 우람한 람보 근육, 섬에서 지옥훈련을 견디고 나온 듯한 강렬한 눈빛, 한눈에 보기에도 고생 꽤나 한 듯한 마스크, 굶주림과 열망이 교차되는 표정…. 계명대 졸업 후 프로지명도 받지 못하고 1994년 연습생으로 삼성에 입단한 그는 1997년 혜성처럼 등장했다. 122경기에 출장해 타율 0.296, 107득점, 65타점. 무엇보다 20-20클럽까지 달성하자 모두들 ‘연습생 신화’라며 주목했다. 98년에는 23차례나 공에 맞아 95년 롯데 공필성이 기록한 시즌 최다사구(22) 기록을 넘어섰다. 그는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그라운드에 집어던지는 허슬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이후의 야구인생은 유랑극단. 1년이 멀다하고 보따리를 싸서 전국 8도를 도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트레이드, FA 보상선수, 방출, 테스트 입단, 방출…. 2005년 말 SK에서 코치 제의를 하면서 연수까지 보내준다고 했지만 거부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자신을 빼놓고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무모하다고 했지만 도전은 계속됐다. 그해 말 동기생 최향남과 경기도 가평의 화악산에서 눈밭을 뛰며 재기의지를 다지던 그는 차를 판 돈으로 에이전트도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갔다. 팀을 구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돈이 떨어져 귀국. 이번엔 한달 만에 집을 팔고 에이전트를 선임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또 실패했다. “나이나 모든 것을 봤을 때 실패확률이 크다는 걸 저도 알았어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성공 가능성도 없이 중학교 2학년 때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고, 대학 졸업 때는 프로지명도 못 받았어요. 항상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가능성을 찾는 게 제 삶이었죠. 포기가 싫었어요.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쳤으니까.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야구에 대한 열망을 다 태워버릴 때까지 끝까지 도전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2007년 추석, 그제서야 단행한 눈물의 은퇴식 이미 무일푼의 신세가 돼 있었다. 계명대 동기인 홍우태가 감독을 맡고 있는 성남고로 찾아갔다. 또 테스트를 받고서라도 프로팀 입단 문을 두드려보기 위해 2개월 동안 성남고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학교측에서 서서히 눈치를 주기 시작하더군요. 친구에게 해까지 끼치기는 싫어 ‘갈 데 있다’면서 큰소리를 치고 교문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차비도, 잘 곳도, 먹을 곳도, 휴대폰 요금도….” 선배가 운영하는 호프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준다기에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 받아서 또 준비하자고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미쳤다”고 혀를 차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호프집이 어려워지면서 월급도 못 받자 2007년 5월 다시 화악산을 찾았다. “3개월만 딱 몸을 만들어 9월에 마지막으로 테스트나 받아보자고 생각했어요. 혼자 밥해먹고 산을 뛰었죠.” 당시 휴대폰으로 찍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저 사람 닮지 않았어요?”라며 소주방 벽면을 장식한 그림을 가리켰다. 수염으로 뒤덮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 “어쩌면 산에서 야구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몰라요. 다 태워버리고 스스로 ‘끝’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세상에 못 나올 것 같았어요. 9월에 하산했지만 테스트조차 받아주는 팀이 없더라고요. 묵묵히 지켜봐주시던 홀어머니가 그해 추석 때 처음 그러시더군요. 더 이상 나이 먹고 아파하는 모습 보기싫다고. 그때 나도 모르게 ‘끝’이라는 단어가 나오더라고요. 제 스스로는 이때 비로소 은퇴를 한 셈이죠.” ○드라마 인생이 드라마를 찍다 스스로 야구에 처절하게 매달린 것인지, 야구가 지독하게 그를 속박한 것인지 알 길 없지만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와 이별을 고했다. 세상으로 나오자 코치 제의가 들어왔고, 사회인야구 쪽에서 평생직장까지 보장한다며 오라고도 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히 돈도 없는데 1000만원이라도 생긴다면 그게 어디에요. 제안이 나빠서가 아니라 야구를 지울 때 다시는 야구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무렵 우연히 연예계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태어나서 생각도 하지 못한 분야. 처음엔 귀를 의심했지만 야구만큼이나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첫 작품은 5월쯤 MBC에 방영될 드라마 ‘2009 외인구단’이다. 8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현세의 야구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드라마로 옮긴 것. 그는 마통탁의 선배로 나선다. “생각보다 비중이 높아졌어요. 어떨 결에 시작했지만 연기도 제대로 배우려고 해요. 야구도 연습생에서 출발했잖아요. 배우도 연습생에서 출발하는 거죠. 야구신은 다 찍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해요. 수원과 문학구장에서 촬영하지 뭡니까. 야구를 소진하고 세상에 나왔는데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팀의 구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야구장에서 촬영하다보니 결국 세상을 연결해주는 건 야구라는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는 배우로 탈바꿈하기 위해 귀도 뚫었다고 고백했다. 야구 껍질을 벗듯 외모나 옷차림도 바꿨다. 프로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도 사업도 프로가 되고싶다 그는 촬영만 없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소주방에서 보내고 있다. 배우가 꿈을 먹여준다면 소주방은 삶을 먹여주는 터전. 먹고, 쉬고, 잠잘 곳이 생겨서 행복하단다. “야구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버렸어요. 큰 짐을 벗고 나니 마음이 넓어지더라고요. 지금은 아니지만, 영원히 불가능할 수 있지만 야구에서 내가 뭔가를 취득하는 게 아니라 베풀 수 있을 때 언젠가는 야구로 돌아갈 거예요.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야구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서 더 치열하게 살 겁니다. 이젠 솔직히 돈을 벌고 싶어요. 여자도 만나고, 소중한 가정도 꾸리고 싶어요. 그동안 야구 때문에 다 희생한 걸 이젠 줄 수 있으니까. 그동안은 고통스럽게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야구를 했지만 이젠 어머니와 새로운 가족을 위해 살고 싶어요. 예전엔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났지만 이젠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어머니도 올해 연세가 칠순이신데.” 어머니 얘기를 꺼내던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세 번만 보따리를 싸도 어지간한 사람이면 신물이 나 유니폼을 벗을 법도 하지만 그는 선수시절 물 한방울 없어도 살아남는 ‘사막의 전갈’처럼 도전했고, 끈질기게 선수생명을 이어갔다. 모두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꿈을 향해 고독한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젠 야구를 태워버리고 배우로서, 사업가로서 그만의 새로운 리그에 도전한다. 꿈을 꾸었기에 그는 행복했고, 꿈을 꾸기에 그는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