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왕년의미녀세터“이젠명품한우토스!”

입력 2009-01-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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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흔히 한국여자배구가 위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2008베이징올림픽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게 결정타였다. 신장 등 신체조건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나지만 예전의 투지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한때 한국여자배구는 아시아의 강호로 통했다. 우리만의 끈끈한 조직력과 팀워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프로 V리그에 앞선 실업배구 시절에는 국내 스포츠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미도파는 1980년대 여자배구 코트를 호령한 최고 명문이었다. 조혜정과 유경화, 김화복, 곽선옥 등 여전히 회자되곤 하는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명, ‘여우 세터’ 이운임(49)이 있었다. 땀 밴 유니폼이 아닌, 정장 차림의 어엿한 식당 사장님이 된 그녀를 스포츠동아가 만나봤다. ○‘박리다매’…저희 식당 홍보 좀 부탁드려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이미 손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서울 종로구 국일관 건물 1층에 위치해 있는 ‘한우 명가’. 크기가 780평에 달하고, 총 좌석 870여석이 구비된 이 한우 전문 식당은 2006년 12월 14일 개장했다. 왕년의 인기 탤런트 이춘식(68)씨의 제안에 탤런트 민욱(62)씨와 이운임이 투자금을 공동 출자했다.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음식점 입지는 ‘마당발’ 이춘식씨가 직접 마련했다고. “저희는 한우 투 플러스 인증을 받은 최고 등급의 고기만 사용해요. 싼 가격에 부담 없이 손님들이 드실 수 있도록 직원 모두가 노력하고 있죠.” 소위 ‘잘 나가는’ 음식점 사장님다운 사업 수완이 느껴지는 이운임의 한 마디였다. 갑작스레 얼어붙은 경기와 경제 불황에도 손님은 끊이지 않는단다. 종업원만 30여명에 달하는 한식당으로 서울 강북에서 가장 크다고 자부하는 이운임은 식당의 특징으로 “소 한마리를 통째로 들여놓는 것”이라고 했다. 각 부위별로 따로 들여오는 게 아니라 전체 고기를 다루다보니 가격 경쟁에서 타 식당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박리다매’로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여러 부위를 맛볼 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장점. 한정식 메뉴가 내걸린 것도 재미있다. 10명 이상이 단체 주문했을 때 1인당 3만원선에서 따로 내놓는다. 기업 단체 손님이 주로 찾는다는 뷔페식 한정식을 올린 까닭은 고기 집만 해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메뉴의 다양화란 긍정적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이춘식 회장님이나 민욱 사장님 모두 유명인들이잖아요. 그저, 이름만 내걸고 대충 하면 손님들이 더 이상 찾지 않겠죠. 그래서 더 부담을 갖고 열심히 노력한답니다. 아, 꼭 한우만고집한다는 것도 꼭 넣어주세요.” ○‘투잡족’ 아줌마, 좋은 아내-좋은 엄마 노릇하기 힘드네 화제를 돌려 슬쩍 가족 얘기를 물어봤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 “벌써 결혼 생활 20년째네요. 하긴 제 나이가 이젠 50줄을 바라보고 있으니깐. 어휴, 징그러워….(웃음)” 이운임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 5월 결혼했다. 남편은 평범한 사업가다. 광고사업체 메소드를 운영하는 전준태(54)씨와 슬하에 아들 두명을 뒀다. 둘 모두 엄마처럼 운동선수를 꿈꾸진 않는다. 큰 아들 승민(18)군은 미대 지망생으로 지난 겨울 수능 시험을 치렀다. 생각보다 점수가 잘 안나왔다며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엄마’로서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둘째 아들 승휴(16)군은 평범한 고교 1년생이다. “승민이가 좀 더 시험을 잘 봤어야 했는데. 그 녀석이 미술에 꽤 소질이 있어요. 운동은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죠. 개구쟁이 둘째도 너무 귀엽죠.”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게 늘 아쉽다. 연중무휴 식당에서 근무하다보니 얼굴을 자주 마주할 수 없다. 그나마 요즘은 수험생 아들을 둔 덕택에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만 평소 하루 종일 서 있다보니 예전 운동할 때 아팠던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온다며 울상을 짓는다. “미안해요.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좋은 아내가 되지도 못하고 있죠. 참, 나쁜 사람이죠?” 사실 이운임은 ‘투잡족’이다. 식당에서 일하기 전부터 의류업체 와룡상사에서 스포츠 용품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익숙한 배구 코트가 아닌 사회생활을 하려니 처음에는 겁도 많이 났고, 어색했지만 시간이 차차 해결해줬다.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감이 생긴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했다. 그녀가 현역으로 뛸 때 활동했던 옛 배구 기자들이나 배구인들이 이런 모습에 모두 의외라며 깜짝 놀란단다. “궁금하면 그 분들이 식당을 찾아오셔서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그런 게 너무 좋아요. 그저 감사할 뿐이죠. 아직도 절 잊지 않았다는 것도요.” ○ 스포츠 미녀스타 원조…1984년 LA올림픽이 가장 아쉬워 “혹시 그거 아세요? 예전의 인기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동아가 선정한 ‘미녀 스포츠 선수’ 부문에 제가 줄곧 순위권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요.” 문득 궁금해진다. 미녀 스타인데, 스캔들은 없었을까. 얼굴이 발개진 그녀는 조심스레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모 탤런트와의 소개팅 얘기였다. “꼭 말해야 하나? 누군지는 잘 기억이 안나요. 언젠가 어떤 지인께서 탤런트와 중매를 서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자리에 나온 그 분 옷차림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비둘기빛 반짝이 무대 의상 같은 거요.(웃음) 저희는 운동만 해서 그때는 ‘때’가 묻지 않았거든요. 단칼에 ‘애프터 신청’을 거절했죠.” 배구 얘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운임은 실력과 미모를 두루 갖춘 1980년대 최고의 선수였다. 지금도 식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코트에서 맹활약하던 이운임을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를 할 때가 가장 흐뭇하다고 했다. 그럴 때면 고기 한점이라도 더 올려주고 싶다는 농도 던진다. 진솔한 여유가 묻어난다. 전남 나주 영강초등학교, 광주 동성여중, 광주여상을 거쳐 1980년 여자실업배구단 미도파에 입단해 1989년 11월 대농에서 은퇴할 때까지 꼭 10년간 활동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달라는 물음에 이운임은 2가지를 공개했다. 첫 번째는 1986년 대통령배 실업배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한 사실. 공격수와 달리 세터는 눈에 띄는 포지션이 아니다. 그러나 신장이 170cm에 불과한 그녀는 끊임없는 연습과 악바리 같은 정신력으로 지금도 쉽게 볼 수 없는 ‘공격형 세터’로 명성을 떨쳤고, 한국배구 최초의 세터 MVP가 됐다. 두 번째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놓친 것이다. 러시아, 중국, 일본, 페루 등 쟁쟁한 강호들이 모인 가운데 최선을 다했지만 일본에 아쉽게 패해 5위에 그쳤다. “이제야 공개할 수 있네요. 사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그 때는 각 팀 감독님들의 반목과 갈등도 있었고 선수들 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처럼 선수 차출 협조도 잘 안됐고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요. 올림픽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저희에게 꿈의 무대였거든요. 요즘 애들이 그걸 알려나? 아무튼 큰 족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여전히 이운임은 배구계와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배구선수 출신들의 모임인 ‘진흥회’에서 김화복 전 대한배구협회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박선옥, 박미희, 장윤희 등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고, 전국 대회에 출전해 무패 행진을 구가하는 종로 어머니 배구단을 10년째 이끌며 코트 인생을 이어간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제겐 배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지금도 가족만큼이나 가장 소중한 부분이죠. 지금도 배구 생각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행복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하고, 슬픈 기억을 하며 소리 없이 울기도 하고 말이죠.”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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