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에는 북한에 대한 분석 수준을 넘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림자 인물이 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에선 비디오 분석관을 따로 두고 상대를 철저히 분석했던 게 주요했다. 2007년 아시아시리즈에서 SK에게 콜드패를 당했던 대만의 퉁이 라이온즈는 그 후 1년 내내 SK 야구를 분석해 전의를 불태웠고, 결국 1년 뒤 복수에 성공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야구와 대등해지고 또 이기기 시작한 2000년대 일본에서 활약했던 선동열 감독이나 김기태 코치 등의 적극적인 정보 제공이 큰 성과를 올리게 해줬다. 굳이 손자병법의 고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정보력이 보여주는 힘은 대단하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전력상으로 일본에게 뒤져있다는 한국 야구가 최근 상대전적에서 오히려 크게 앞서 있던 것도 바로 일본 야구에 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우리 야구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WBC에서 일본의 한국 야구 분석은 그 어떤 때보다 치열했다. 한 번의 패배를 우연으로, 두 번의 패배를 놀람으로, 세 번의 패배를 치욕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일본이 이제는 한국을 기본 전력만으로도 쉽게 이길 수 있는 팀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2000년대 한국 야구의 수확이었지만, 반대로 일본에게는 분발의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분석, 더 나아가 파헤치고 벗겨낸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치밀했던 일본 야구의 분석은 결국 한국에게 지난 몇 년 동안 당했던 치욕을 한 번에 되갚았다. 점수 차를 떠나 김광현을 무장해제 시킨 걸로 이미 끝난 경기였다. 이선희-구대성의 뒤를 잇는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서슴없이 달았던 김광현은 1회의 아웃카운트 3개가 모두 삼진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쥐구멍에 숨어야 할 투구 내용이었다. 물론 김광현의 가장 큰 단점이 컨디션의 부침이라는 데 있어서 이날의 컨디션이 잘 던지던 날들에 비해 원체 나쁘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광현의 자질을 봤을 때 이 정도로 얻어맞을 투수는 분명 아니었다. 슬라이더. 일본 타자들은 철저하게 그의 슬라이더를 노렸고, 완벽하게 공략했다. 일본 만이 발견한 어떤 투구 습관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런 게 있었다 하더라도 김광현의 슬라이더가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본이 얼마나 그 공을 치기위해 연습을 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상 직구와 슬라이더 두 개를 가지고 던지는 김광현의 피칭은 1회 초반부터 슬라이더가 맞아 나가며 급격히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3월 초라는 시기적 문제로 인해 직구는 어차피 위력이 약했고, 또 그걸 억지로 던지려다보니 팔에 힘이 들어가 의지보다 높게 형성되고 말았다. 체인지업과 국가대표 팀 합류를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배웠다는 스플리터를 또 다른 구종으로 갖고 있었지만 주자가 계속 모여 있는 위기 상황에서 익숙하지 않은 공을 던지는 것 역시 모험이었다. 결국 김광현은 안 되는 슬라이더를 계속 던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실점은 계속 늘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 ‘정신력으로 싸운 경기.’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으레 꼭 이겨야 한다는 의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뭔가의 힘을 끌어내던 우리였지만, 투지 면에서도 오히려 이번만큼은 한국을 꺾어야 한다는 일본의 정신력이 더 컸고 결국 이렇게 따지다보니 경기력, 전력 분석, 경기에 임하는 자세 등 우리가 일본에게 이길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자기네와의 경기에 김광현이 나올 거란 판단으로 그를 해부했지만, 우리가 한 거라고는 김광현이 보나마나 또 일본의 콧대를 꺾어줄 거라고 생각한 게 다였다. 물론 한 번의 패배로 끝나는 건 아니기에 치욕적인 패배든 콜드게임의 굴욕이든 매우 심각하게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우선 1차 목표가 2라운드 진출인만큼 이어지는 경기에서 중국을 이기면 어쨌든 그만이다. 1회 대회를 우승으로 이끈 일본도 정작 전적은 겨우 5승 3패였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일본을 부끄러운 우승이라 비꼬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이기면 된다. 1회 대회에선 패해도 회생의 가능성이 있던 경기를 잡았으나 무조건 이겨야 됐을 경기에서 졌고, 반대로 2회에선 굳이 한 경기를 져야 한다면 포기할 수 있는 게임을 내줬다. 문제는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만났을 땐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겠느냐 하는 데 있다. 90년 대 슈퍼게임 이후 이젠 우리도 일본과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느끼기까지는 약 10년이 걸렸다. 한 번의 패배로 일본 국가대표 팀과의 인상이 10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일만은 없어야 할텐데 말이다. 이제 와서 며칠 만에 일본 팀을 분석하기는 늦었다. 다만 일본이 우리나라 야구를 현미경 관찰하기 시작한 이상 우리도 이제는 전략을 바꿔나가는 게 차선책인 듯하다. -엠엘비파크 유재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