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성민.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단 3초의 장면을 위해 수년간 기른 머리를 바짝 깎았다. 비중 있는 여주인공도 아니었다. 줄거리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신도 아니었다. 너무 짧은 머리는 개인적으로 차기작 선택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 ‘내사랑 내곁에’의 춘자 임성민은 삭발을 감행했다. 스태프들도 놀랐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이유를 묻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는 간결하고도 힘있는 답이 돌아왔다.
“이미 30cm 이상 머리카락을 자르고 촬영 중이었는데 감독님이 갑자기 삭발을 제안했다. 삭발은 애초 대본에도 없었다. 주변에서 모두 만류했지만 고민 끝에 자르기로 결정했다. 감독님을 믿었고, 후에 ‘너 그때 비겁했구나’라는 후회는 안 할 것 같았다. (자르지 않는다면) 10년, 20년 뒤 다시 봤을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삭발하니 실제로 극에만 집중을 하게 되고 캐릭터에 애정이 생겼다”는 그는 “실제 영화에서는 한 컷 정도, 3초쯤 나오더라”며 방긋 웃어 보였다.
미소를 보였지만 최근 아침 방송을 통해 미용실에서 꾹꾹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던 그녀의 모습을 이미 본 터였다. 임성민은 “머리 길이가 짧아지니 옷을 예쁘게 입기 힘들다”며 머리 끝을 매만졌다.
극중 등장했던 속옷 신에 대해서도 “선정적으로 비춰질까 고민했다. 곱고 젊은 여자 식물인간 환자를 드러내기 위한 장면이었다”며 “3분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수개월간 몸매 관리를 해야했다”고 그 다운 모범 답안을 들려줬다.
“촬영 당시 5kg을 감량한 상태였지만, 그 신을 앞두고는 2kg을 더 뺐다. 아픈 사람이 살 쪄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 환자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에서 다큐처럼 촬영하고 있기에 카메라 기술이나 각도로 몸매를 커버할 수도 없었다.”
임성민은 춘자 캐릭터를 맡자마자 ‘군살을 없애자’고 다짐했다.
그는 “트레이너와 함께 근육을 만들지 않고 선을 살리는 운동을 했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 등산을 다니고 밤마다 반신욕을 했다. 굶기 보다는 탄수화물을 최대한 절제했다”고 숨은 노력을 들려줬다. 다이어트는 촬영장에서도 이어졌다. “맛있는 밥차를 보며 허기를 삼키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음식을 조절하느라 신경까지 예민해졌다”고 덧붙였다.
배우 임성민.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삭발과 노출 외에도 그녀의 연기 중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눈 연기다. 극중 양쪽 눈동자가 공허하게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순간의 모습은 식물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임성민은 “환자 역을 연기하기에 적합한 눈”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식물인간은 초점없는 눈을 계속 뜨고 있고, 너무 오랜 기간 경과하면 시력을 잃어간다”고 공부한 지식을 들려준 그는 “내 눈은 정면을 봐도 카메라에는 살짝 위를 보는 것처럼 찍힌다. 또렷한 눈매를 보여야 하는 아나운서 시절엔 오히려 시선 처리가 어려운 눈이었다. 항상 카메라를 지지하는 삼각대 다리 부분을 보고 멘트를 읽었다”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남모른 핸디캡을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한 시간이 무려 7년여(아나운서 재직 기간). 이후 우여곡절 끝에 연기자로 전환, 올해로 9년 차 배우가 됐지만 그에게는 아나운서로 있던 시간이 또 한번 발목을 잡고 있다. 아나운서 출신 배우라는 타이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그 증거다.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고도 KBS 공채 아나운서 20기로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던 임성민은 “보수적인 집안 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배우 생활을 할 수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애초 내 길이 연기자였는데 아나운서 이미지를 안고 사는 것은 날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핸디캡이 됐다. 꿈을 위해 좀 더 일찍 용기 내지 못했던 것이 많이 후회된다.”
현재 임성민은 2010년 첫 방송 예정인 드라마 ‘동방의 빛’에서 명성황후의 상궁 역으로 출연이 확정된 상태다. 그는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나운서로 재직할 때는 특별한 병도 없는데 몸이 많이 아팠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배우로 사는 지금은 몸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내게 연기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안 가려고 할수록 결과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짜여진 운명이다.”
이유나 동아닷컴 기자 ly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