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맘은 덩크슛 몸은 에어볼…아! 링은 먼곳에

입력 2009-12-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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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다리의 슬픔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한다”던 앨런 아이버슨(34·필라델피아)의 말은 정녕 사실인가. ‘궂은 일’이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리바운드에 적극 가담했지만 전영희 기자(10번)가 공을 잡으려는 순간, 하늘 위에서 긴팔이 내려와 공을 낚아채 갔다.

저질 체력, 코트위 생존기, SK 2군과 함께 농구체험

‘파부침주(破釜(심,침)舟·솥을 부수고 배를 침몰시킨다).’

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다. 진(秦)나라와 겨루던 초(楚)나라 항우는 병사들에게 3일간 먹을 식량만 휴대하고, 모든 솥을 다 부수(破釜)라고 지시했다. “3일 후에는 뭘 먹느냐?”는 질문에 항우는 “승리한 후, 진나라의 솥을 이용해 밥을 먹자”고 대답했다. 장강을 건넌 초나라 군대. 항우는 다시 명령을 내려 타고 온 모든 배를 물속으로 침몰시켰다((심,침)舟). 이기지 못하면 살아 돌아올 방법이 없는 전쟁. 사기가 오른 항우의 군대는 연전연승이었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프로농구 서울 SK 나이츠 체육관. 라커룸에 들어서자, SK그룹 최태원(49) 회장이 강조했다는 사자성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루하루를 파부침주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선수들이 있다. 한 때는 잘 나가는 선수였지만,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2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일의 1군.’ 16일, SK의 2군 유니폼을 입었다.


○걸음마 뗀 2살배기 프로농구 2군
21일, 2009동아스포츠대상 프로야구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김상현(29·KIA)은 오랜 2군 생활을 뚫고, 스타덤에 올랐다. 1983년에 시작된 프로야구 2군은 1990년부터 본격적인 리그의 형태를 갖췄다. 20년 간 텃밭을 가꾼 프로야구에서는 무수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탄생하고 있다.
반면, 프로농구의 2군 리그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08년 9월1일 정식으로 출범한 2군 리그. 10개 구단 가운데 2군을 보유한 팀은 SK와 인천 전자랜드, 부산 KT, 대구 오리온스 4개 뿐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도 모든 팀이 2군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SK 전희철(36·전 SK2군 감독) 코치는 “물론, 농구라는 종목 특성상 깜짝 스타 탄생이 힘든 부분도 있지만, 2군 리그가 활성화 되면 재능있는 선수들이 더 꽃을 피울 것”이라고 했다. ‘수련선수 신화’를 창조한 상무 이중원(26·前KCC)과 KT 2군에서 머물다 현재 안양 KT&G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박상률(28)이 이를 증명한다.


○1군 올라가는 순간, 100만원 확보.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은 꿈
“(김)경언(20)이는 며칠 전에 (1군으로) 올라갔습니다.” 2군을 지도하는 SK 허남영(37) 전력분석팀장은 바뀐 선수 명단부터 확인시켰다. SK 2군 선수의 연봉은 2000만원으로 동일하다. 7명의 연봉을 다 합쳐도 웬만한 1군 선수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허 팀장은 “(김)경언이처럼 1군에 가면, 현실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1군에 올라가면 하루 1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1군으로 올라가면 규정상 최소 열흘간은 2군에 내려올 수 없다. 1군의 부름을 받는 순간, 100만원 확보. 20일만 있으면 한달 월급 이상을 가욋돈으로 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 가드 전건우(23)는 “2군은 언제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보이스카웃’ 정신을 들먹였다. “빨리 유니폼 갈아입어요.” 밖에는 이미 명지대 선수들이 연습경기를 위해 몸을 풀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홈경기 유니폼(흰색)인데, 혼자서만 원정경기 유니폼(빨간색). “왜 저만 색깔이 달라요?”, “눈에 잘 띄고 좋죠 뭐.” 허 팀장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끄덕.


○벤치에서는 “TALKING, TALKING!”
몇 번의 몸 풀기 레이업과 미들 슛. 땀도 나지 않았는데 벌써 경기 시작이다.

“1쿼터는 벤치에 계세요.” 허 팀장의 지시에 일단 앉았다. ‘벤치에서는 등을 대고 있지 말라’는 농구격언이 떠올랐다. 팀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눈망울을 굴렸다. “굿디(굿디펜스)야. 헬프(도움수비).” 포워드 김재영(24)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귀가 따갑다. 김재영은 “동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TALKING’ 역시 벤치의 주 임무”라고 했다. 고함소리와 함께 1쿼터가 끝났다.

땀방울을 쏟아내는 센터 김동민(23)의 얼굴에 수건을 갖다 대려하자 출격명령. 2쿼터에는 당당히 2번 포지션(슈팅가드)이다. “저는 뭘 하면 되죠?”라고 묻자 가드 문형준(23)이 “공 주면 (슛을) 던지라”며 엉덩이를 툭 치고 코트로 향했다.

일반인은 좀 봐 줄줄 알았건만…. 수비수를 잘못 만났다. 명지대 입학예정인 김지웅(18)은 찰거머리 같았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이라, 바싹 잡힌 군기. “살살해 주세요”라고 몇 번 말을 걸었지만, 그의 입술은 마치 ‘슬램덩크의 채치수’처럼 굳게 닫혀있었다. 결국 몇 번의 슛은 모두 링을 외면했다.


○1군에 가고 싶다면, 궂은일에 치중하라
어느덧 10분경과. 허 팀장은 “3쿼터까지는 책임지라”고 지시했다. SK 1군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궂은일에 치중해야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다. 어차피 공격이야 나머지 4명의 선수들만으로도 충분했다. 3쿼터에서는 공격 이외의 부분에 치중하기로 결심. 시작과 함께 링을 튀긴 공이 손바닥에 와 안겼다. 첫 번째 리바운드.

명지대 가드 양승성(21)에게 달라붙자, 양승성은 “올 아웃”을 지시했다. 일대일을 하겠다는 뜻. “야, (상대는 완전) 아마추어인데 이건 아니잖아.” 김진수(24)와 최고봉(26)의 아우성에도 야속한 상대 가드는 돌파를 시도했다. ‘이대로는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들이밀었다. 첫 번째 파울.

3쿼터 막판, 미들라인에서 맞은 오픈 슛 기회. 다리가 풀려서 인지 에어볼.

공이 정점에서 떨어지는 순간, 센터 김동민이 솟아올랐다. 팁 인 슛. 최고봉이 “굿 패스”라고 소리치며 반대쪽 코트로 향했다. ‘패스 아니었는데….’ 어쨌든 첫 번째 어시스트.


○희망바이러스 전파의 사명, ‘뜨겁게 호흡 하겠다’
4쿼터는 다시 벤치로 복귀했지만, ‘TALKING’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경기 종료. 김재영이 다가와 “20분 출전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면 준수한 기록”이라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칭찬도 잠시. 선수들이 “스피드와 순발력, 점프력 모든 것이 다 부족하다”며 웨이트트레이닝실로 끌고 갔다. 버티컬맥스라고 불리는 점프운동기구로 다시 한 번 하반신에 고통을 줬다. “뱃가죽이 찢어질 때까지 해야 한다”며 복근운동까지 시켰다. 선수들은 그것도 모자라, “저녁식사 후 개인훈련을 한다”고 했다.

이틀 뒤인 18일. “2군 선수는 언제든 준비돼 있어야 한다”던 전건우는 1군행을 통보받고, 부산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SK 김지홍(40) 감독 대행은 “변현수(23)의 허리가 안 좋아, 앞 선에서 잘 달려주고 수비에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를 (1군으로) 올렸다”고 설명했다.

설레는 버스 안. 희망을 품고 달린 전건우는 3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살벌하게 수비 하겠다.” 둘째, “형들이 한 마디를 할 때, 나는 세 마디 씩 해서 분위기를 띄우겠다.” 셋째, “이번 기회를 꼭 잡겠다.” 20일. 전건우는 부산 KT 전에서 11분34초를 뛰며,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김지홍 감독대행은 “수비에서만큼은 기대대로 잘 해줬다”고 평했다.

6연패 중인 SK. 과연 2군의 희망바이러스는 1군에도 힘을 보탤 수 있을까.

용인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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