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손택균의 카덴차>‘어벤져스’: 궁극의 남성 ‘어른애’用 엔터테인먼트

입력 2012-05-07 0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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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되는 한해다.
실은 2년쯤 전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업그레이드한 크리스천 베일 버전의 배트맨이 7월 은퇴한다. 최종편의 적수는 1993년 원작 만화에서 브루스 웨인의 척추를 분질렀던 괴력의 약물인간 베인. 이 걸출한 몸빵괴물 캐릭터를 창안했던 스토리작가와 그래픽디자이너는 1997년 조엘 슈마허가 저질렀던 능욕(‘배트맨과 로빈’)의 한풀이를 고대하고 있다. 예고편은 스스로를 ‘영웅서사시(epic)’라 칭했다. 자만이 아니다. 4일 공개된 2분 19초 분량의 트레일러. 컷마다 ‘헉’ 소리 절로 난다.

7월 개봉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공개 스틸 컷.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


샘 레이미와 결별한 스파이더맨 리부트 프로젝트도 같은 달 첫 선을 보인다. 새 주인공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불쌍하게 버림받는 친구 역을 맡았던 앤드류 가필드다. 구관(舊官) 토비 맥과이어보다 기럭지가 월등해서인지 예고편 액션만큼은 훨씬 더 시원시원하다. 맥과이어를 위한 맞춤옷 같았던 ‘여러분의 상냥(하고 몹시 불쌍)한 이웃’ 이미지를 대체하기가 쉽지 않을 듯 했지만, 일단 순조로워 보인다. 목숨 건 싸움 중에 끊임없이 얄밉게 조잘대는, 뭘 해도 비극으로 치닫는 지지리 운 없는 아웃사이더 슈퍼히어로라는 원작 캐릭터 설정에 보다 가까워질 거라는 소식. 역시 4일 공개된 2분 26초짜리 트레일러는 우울한 정서와 화려한 비주얼을 적절히 비벼냈다.

다시 시작하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피터 파커의 우울한 가족사와 성장기를 보다 밀도 있게 조명한다.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이달 개봉한 ‘어벤져스’는 7월의 두 성찬을 앞둔 애피타이저 정도가 될 거라 생각했다. 몇 년 전이었나. 마블에서 어벤져스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언맨과 헐크야 일단 그럭저럭 내놓았지만 나머지 두 시대착오 메인캐릭터는 어쩔 건데. 날개 달린 투구 쓰고 해머를 휘둘러대는 우주의 신(神) 토르. 성조기 유니폼에 별표 방패를 든 촌티작렬 전쟁영웅 캡틴아메리카.
캡틴아메리카를 내세운 2011년의 ‘퍼스트 어벤져’는 예상대로 어색하고 졸렸다. 하지만 몇 달 앞서 나온 ‘토르: 천둥의 신’은 이야기와 캐릭터의 만듦새가 기대 이상이었다. ‘토르’의 악당 로키가 어벤져스의 첫 적수로 임명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꼭 필요했던 두 개의 퍼즐 조각을 어찌됐든 준비했다. 야심찬 “어벤져스 어셈블”의 결과는? 애피타이저라니 웬걸. 상다리 부러질 듯 풍성하면서도 한 접시 한 접시 죄다 맛깔스런, 드물게 훌륭한 잔칫상이다.

어벤져스 프로젝트를 한 해 앞두고 영화화된 두 메인캐릭터 토르(왼쪽)와 캡틴아메리카.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꼬마 때 어머니를 따라 책방에 가면 읽으라는 ‘글자 책’은 거들떠도 안 보고 1000원짜리 ‘로봇대백과’만 만지작거렸다. 나이 먹어 번 돈으로 만화책이나 사들이고 있는 1970년대 생 한국 남자가 나 뿐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최근 1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그런 취향의 ‘어른애’들에게 경이로운 판타스틱 살풀이다.
슈퍼히어로 코믹스라는 화수분 콘텐츠를 성인 대상 영화에 어울리도록 다듬어낸 첫 타자는 1989년 팀 버튼의 ‘배트맨’이었다. 하지만 버튼의 외곬 B급 취향은 1992년 2편을 끝으로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버튼도 좀 지나쳤지만 스튜디오는 어리석게도 그를 아예 반면교사로 설정한 듯했다. 이후 10여 년간 슈퍼히어로 영화 전체가 퇴락했다. 설익은 컴퓨터그래픽 데모 버전의 실험장으로 소모될 뿐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도외시하면서 원작 코믹스에 부끄러운 유아용 장난감만 양산했다. 조엘 슈마허의 알록달록 배트맨 두 편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미래를 끝장내는 조곡(弔哭) 같았다.

조지 클루니가 절대로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될 만한 저주의 괴작 ‘배트맨과 로빈’. 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


21세기다운 슈퍼히어로 영화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년)이 시동을 걸고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비긴즈’(2005년)가 가속시켰다. 툭툭 튀며 신경 거스르던 시각효과는 차츰 이야기 뒤로 숨어들어 안정을 찾았고 캐릭터들의 사연은 유아기를 벗어났다. 도중에 ‘헐크’(2003년)와 ‘아이언맨2’(2010년) 등의 위기를 몇 차례 맞기도 했지만.
10년을 진화해 도달한 ‘어벤져스’는 이 영역 종사자들이 일궈낸 한 궁극의 굿판으로 보인다. 여섯 살 때 문방구 유리진열대가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맛만 다셨던 초합금 5단 합체변신 골라이온을 손에 넣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최신형 장난감으로 가득한 놀이방에서 혼자 마음대로 놀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어린이’에 감독 조스 웨던을 비유한 외신의 코멘트는 매우 적절하(면서 무한히 부럽)다.

무엇이든 안정돼야 온전하다. 슈퍼 영웅들을 어색함 없이 스크린에 불러낼 수 있는 기술은 최근에야 안정을 찾았다. 블루 스크린 위에서 고개를 젖히고 만세를 부른 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던 고(故) 크리스토퍼 리브의 용기를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1930, 40년대 만화가들이 상상해낸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의 모습을 영화에서 원형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요 몇 해 사이의 일인 것이다.

1978년 영화 ‘슈퍼맨’ 개봉을 앞두고 TV 예고편이 강조한 것은 하늘을 나는 영웅을 스크린에 그려낸 '혁신적 신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 1편이 지금도 사랑받는 것은 원형의 매력에 충실한 캐릭터와 가슴 뛰는 배경음악 덕분일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그러나 기술의 성취를 자랑하는 순간 그 영화는 영화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 영화는 신형 아이폰의 프레젠테이션 쇼가 아니다. 변신합체 장면의 위용에 스스로 도취돼 ‘어때, 이거 정말 대단하지 않니?’만 남발하다가 처참하게 값비싼 자장가를 만들어버린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좋은(?) 예다.
정말 멋진 기술은 사용자가 그 존재를 의식할 수 없는 기술이다. ‘기술’이라는 단어를 ‘디자인’으로 바꿔도 괜찮을 거다. 이미 오랜 세월 온전한 양태를 고맙게 이루고 있던 강 위에 굳이 아모르포팔러스 티타눔 꼭 닮은 유리꽃을 띄워 놔야 “디자인 좀 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어벤져스는 영리하다. 3D와 CG는 시종 튀지 않는다. 기술이 초라해서가 아니다. 굳이 앞에 나서서 캐릭터나 이야기를 눈가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지개 일곱 빛깔은 하나하나 독립적이다. 일곱 색을 일렬로 모아 그린 것을 오랜 세월 봐 와서 익숙할 뿐이다. 한 줄만 어긋나도 어색하다. 조스 웨던은 제멋대로 튀는 캐릭터들을 한데 잘 간추려 묶어 놓고 그 하나하나의 사연과 매력을 절묘하게 조율하며 담아냈다. 노랑 옆에 보라가 아닌 초록을 놓듯 헐크 옆에 아이언맨을 가까이 붙이고 캡틴은 멀찌감치 떼어 놓았다.

영화는 헐크(왼쪽)와 아이언맨을 묘하게 특히 더 잘 통하는 동료 관계로 엮어 이야기 진행에 힘을 보탰다.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낯간지러운 시대착오를 스스로도 실토하는 캡틴아메리카는 얼핏 메인캐릭터 가운데 제일 나약하고 볼품없다. 그러나 강철갑옷(아이언맨),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헐크),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 신의 육체(토르) 사이에서 피 흘리고 신음하며 악전고투하는 그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다. 개인전보다는 팀플레이에서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특유의 리더십을 발산하는 원작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린 덕이다.
웨던은 주로 '뱀파이어 사냥꾼 버피‘ ’오피스‘ 등 TV드라마를 연출해온 감독이다. 잡다한 캐릭터들의 비중과 사연을 조율하(면서 각각의 이기적 아우성을 해소해주)는 데는 이력이 났을 만하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몇몇 삐딱한 야유 외에 대부분의 외신이 찬사 일색이다. 칭찬의 대상은 대개 비주얼이 아니다. 균형 잡힌 연출과 “비교적 (매우) 훌륭한” 각본이다. 웨던은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 12세용 영화를 만들라는 소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저 ‘어른애’인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어벤져스를 소집한 닉 퓨리가 “약간 보완했다”고 말한 캡틴아메리카(가운데)의 복장은 여전히 촌스럽다.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은 많이 보완됐다.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클래식’은 콘텐츠가 발생한 시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콘텐츠를 주조한 창작자의 태도가 클래식을 형성하는 한 요인일 것이다. 배우들의 진지함과 감독의 치밀함. ‘어벤져스’는 두 세대 이상을 건너 성장해 온 대중콘텐츠가 스크린을 통해 이뤄낸 하나의 새로운 도전 양상이다. 이제 이 시리즈에 거는 기대의 목표점은 마블코믹스 최강의 악당(…이라기보다는 그냥 ‘사기 캐릭터’) 타노스의 등장을 예고한 속편을 훌쩍 뛰어넘는다. 무수한 마블 히어로들이 아이언맨 편과 캡틴아메리카 편으로 갈라서 피 터지게 치고받은 화제의 이벤트 ‘시빌 워(Civil War)’까지 성급히 상상하게 만든다.

당대의 싸구려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몇 세기 뒤 고품격 클래식으로 승격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슈퍼맨은 올해로 73세다. 고희를 넘긴 슈퍼인간 박쥐인간 거미인간의 사연은 충분히 깊어졌다. 수많은 스토리작가와 만화가들이 그 캐릭터의 변형과 진화에 애를 쏟았다. 때로 허리가 꺾이며 패퇴하고 눈앞에서 연인과 동료를 잃었다. 메인캐릭터들은 적어도 한 번씩 죽었다가 부활하는 기구한 리뉴얼을 거쳤다. 로마의 영웅들이나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보다 이들이 싸구려로 취급될 이유가 있을까.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중 이들을 내세워 풀어내지 못할 내용. 이제 거의 없을 거다.
어쨌거나 ‘어벤져스’. 단연 올해 최고의 쇼다. 아마도 7월까지는.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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