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투혼·환희·눈물의 124승…그것은 위대한 드라마였다

입력 2012-11-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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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코리안특급 박찬호 ‘신화에서 전설로’

94년 다저스 입단 96년 역사적인 코리안 첫승
5년연속 두자릿수 승리 후 6500만달러 텍사스로
2002년부터 하향세 불구 WBC 4강 신화 한몫


17시즌만에 피츠버그서 亞 최다 124승 금자탑
오릭스 거쳐 고향팀 한화서 1년간 마지막 불꽃


1994년 4월 8일 다저스타디움. LA 다저스가 애틀랜타에 0-4로 뒤진 9회, 앳된 얼굴의 동양인 투수가 마운드에 섰다. 한국에서 막 건너온 신인.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청년은 6타자를 상대로 1안타 2볼넷을 내주고 쑥스럽게 덕아웃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 짧은 투구는 한국야구사에 기념비적 장면으로 남았다. 한국선수가 처음으로 ‘꿈의 무대’를 밟은 순간. 그 투수는 나중에 ‘코리안 특급’이라는 애칭을 얻은 박찬호(39)였다.


○1996년 4월 7일

학창 시절부터 강속구로 유명했다. 고교 3학년 때 시속 147km짜리 직구를 던졌다. 한양대에 재학 중이던 1994년 다저스와 계약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커브스전에서 마침내 한국인으로는 첫 승을 거뒀다. 이후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앞세워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이듬해 14승을 시작으로 2000년 18승으로 정점을 찍었고,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에 성공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실의에 빠져있던 한국민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그의 모습에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 2001시즌 종료 후 FA(프리에이전트)가 돼 5년 총액 6500만달러의 거액을 받고 텍사스로 이적했다.


○2010년 10월 2일

시련이 찾아왔다. 2002년부터 성적이 하향세를 탔다. 유니폼도 자주 갈아입었다. 샌디에이고와 뉴욕 메츠를 거쳐 다저스로 돌아갔고, 다시 필라델피아로 이적했다가 뉴욕 양키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태극마크’라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일본과의 결승전 승리투수가 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마무리투수로 4강 신화를 함께 썼다. 여전히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동의어였다. 마지막 소속팀 피츠버그에서 그는 결국 역사를 썼다.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전에서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째를 올려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보유했던 아시아 선수 최다승 기록을 바꿨다. 1994년부터 17시즌 동안 쌓아올린 금자탑이다.


○2012년 11월 29일

일본 오릭스에서 2011년을 보낸 그는 올해 “선수생활을 한국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뤘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만든 예외 규정에 힘입어 고향팀 한화에 입단했다. 당연히 한국야구계는 들썩거렸다. 관심도 쏟아졌다. 그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시즌 첫 등판인 4월 12일 청주 두산전에서 6.1이닝 2실점으로 첫 승을 거뒀고, 이후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5승10패, 방어율 5.06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따뜻한 조언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스스로 “감격적이었다”고 표현한 1년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때’가 왔다. 2012년 11월 29일. ‘선수’ 박찬호의 마지막 소속팀 한화는 ‘은퇴 결정’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찬호의 7번째 결혼기념일.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았던 이날, 그는 가장 무거운 결정을 내렸다.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good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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