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박경완 키운 조범현 “제자와의 대결 손꼽아 기다렸다”

입력 2014-04-09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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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수원 성균관대구장에서 열린 kt와 SK 2군의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오랜 시간 사제의 연을 나눴던 조범현 kt 감독(오른쪽)과 박경완 SK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수원|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 사제지간서 감독 대 감독으로 재회한 두 남자의 특별한 인연


1993년 쌍방울서 신예 코치·포수로 첫 만남
3년간 지옥훈련…박경완 포수 성장의 밑거름
2010년엔 함께 광저우아시안게임 우승 기쁨
퓨처스리그서 kt 감독·SK 2군 감독으로 재회


1993년 전주. 나이 스물 하나의 쌍방울 신예포수 박경완과 서른 셋의 신인코치 조범현은 처음 만났다. 그 때 두 사람은 21년 후 감독으로 마주 앉아 함께 미소를 지을 날을 상상이나 했을까.

8일 오전 10시 경기도 수원시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야구장. 퓨처스(2군)리그 홈 개막경기를 앞둔 kt 조범현(54) 감독과 원정팀 SK 박경완(42) 2군 감독이 만났다. 바로 옆 그라운드에는 kt의 젊은 유망주들이 쌀쌀한 봄바람 속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뛰고 있었다. 21년 전 그들이 함께 흙투성이가 됐던 그날처럼.

선수와 코치, 그리고 선수와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준우승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함께 이뤘던 두 남자의 인연은 이제 그라운드를 사이에 놓고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는 감독 대 감독으로 이어졌다.


● 감독 대 감독으로 제자와 승부할 날을 기다렸던 스승

남다른 두 감독의 인연. 기자는 이들에게 먼저 “21년 전, 오늘 같은 순간을 상상이나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1993년 박경완은 연습생 출신 후보 포수였다. 199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조범현 코치는 지도자로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당시엔 그 누구도 박경완이 영구결번을 남기는 국내 최고의 포수가 될지, 조범현 코치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명감독이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박경완 감독은 “처음 인사드렸던 날이 벌써 20년이 더 된 것 같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감독님 덕분이다”며 “감독이 돼서 감독님과 경기하는 순간? 그 때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 감독의 말을 듣고 있던 조 감독은 “나는 상상했고 손꼽아 기다렸다”고 답했다. “처음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수 시절의 박경완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로도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감독 대 감독이 돼서 만나려면 내가 정말 노력해서 오랜 시간 버텨야 되겠구나’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며 웃었다.

1993년 첫 만남 이후 21년 동안 두 감독은 많은 것을 이뤘다. 그 시작은 1993년부터 3년의 시간이었다.


● 3년간의 지옥이 만든 ‘오늘’

박 감독은 지옥 같았던 3년의 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 훈련 때 그가 들려준 추억이다. “쌍방울에는 배터리 코치가 없었다. 삼성에서 은퇴한 조범현 선배님이 배터리 코치로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쁨은 곧 지옥이 됐다. 매일 공 300개를 쌓아놓고 블로킹 훈련을 했다. 하루는 누가 옆집으로 이사를 오기에 봤더니 감독님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날부터 집 앞 놀이터에서 매일 밤 훈련이었다. 감독님도 함께 뒹굴었다. 힘들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너무 지쳐 쓰러져도 온몸에 공이 날아왔다. 얼마나 미웠으면 ‘차라리 날 죽여’라고 욕한 적도 있었다.”

조 감독은 평소 최고 포수로 성장한 제자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나. 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선수가 된 거지”정도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 깊은 속내를 꺼내는 자리에서는 “마치 흰 도화지 같았다. 나쁜 버릇이나 잘못된 생각이 없는 참 순수한 청년이었다. 조금만 도와주면 흰 도화지 가득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열심히 훈련했다. 나 역시 많이 배웠다.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는 말을 하곤 했다.


● 제자의 멋진 은퇴식과 영구결번, 누구보다 기뻤던 스승

박 감독은 5일 문학구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했다. 현역 시절 등번호 26번은 SK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됐다.

조 감독은 “박 감독, SK에 영구결번 또 있었나? 처음이지?”라고 물으며 “시즌 중이라서 정신이 없었나 보다. 은퇴식에 꽃을 보낸다는 걸 깜빡했다. 은퇴식 장면도 못 봤다”고 미안해했다. 그러자 박 감독은 “은퇴식 전에 제가 전화 드려 통화도 했는데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못 보셨어요? 제가 은퇴식에서 ‘모든 것이 조범현 감독님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라며 웃었다. 조 감독은 “사실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은퇴식을 뒤늦게 봤다. 마음이 참 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감독이라서 더 그랬는지…. 그동안 정말 잘했다, 수고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눈물의 작별, 그리고 금메달이라는 마지막 공동작품

대화는 다시 과거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 쌍방울에서 최고의 포수로 성장한

박경완은 구단 재정 악화로 인해 1997년 말 현금 9억원이 낀 2대1 트레이드로 현대로 이적했다. 첫 이별이었다. 조 감독은 “워낙 구단이 어려운 상태여서, 많이 아쉬웠다. 그러나 선수를 생각했을 때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었다”고 기억했다. 박 감독은 “처음 헤어질 때 정말 막막했었다. 그 직후 감독님이 현대 코치로 오실 뻔한 일이 있었다. 다시 뵐 수도 있겠구나 하며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회는 한참 후에 이뤄졌다. 2000년 삼성 코치로 옮겼던 조범현은 2003년 SK 감독이 됐고, 박경완은 프리에이전트(FA)로 SK 유니폼을 입으며 감독과 선수로 다시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박경완은 SK에서 한국시리즈 3회 우승을 이끌며 구단 사상 첫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조범현 감독은 2006년 시즌을 끝으로 SK에서 퇴임했지만 2009년 KIA에서 한국시리즈 정상에 섰다. 감독과 코치로 마지막 만남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이었다. 당시 아킬레스건 수술을 미루고 대표팀에 포수로 합류했던 박경완은 “조금 아프지만, 조 감독님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나도 없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달려왔다. 후회는 없다”는 말로 다른 선수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그리고 금메달이라는 최고의 작품을 스승과 함께 이뤘다.


● 앞으로 펼쳐질 인연의 하이라이트

잠시 조 감독이 자리를 비우자 박 감독은 “감독이 된 후 유일하게 좋은 점은 아픈 몸으로 뛰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하나 뿐이다. 선수 때는 생각도 못했던 어려움이 많다. 발목과 무릎 아팠던 것이 머리로 올라왔다. 감독님께 많이 배워야겠다”며 웃었다.

경기 준비를 위해 헤어질 시간, 조 감독은 “시간 남을 때 우리 팀 포수들 좀 가르쳐달라”며 농담했다. 박 감독은 “저희 팀 포수도 못 가르치고 있다”며 미소 지었다. “막내 팀 살살 잘 부탁한다”는 조 감독의 말에 박 감독은 “이제 선수로 은퇴했으니 꼭 식사한번 모시고 싶다. 잘 부탁드린다”며 정중히 인사했다. 박 감독이 떠난 후 조 감독은 ‘제자’가 아닌 ‘적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나도 많이 배우겠다.”

21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조범현과 박경완의 인연. 이들은 이제 처음으로 감독이라는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 인연도 충분히 영화처럼 극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라운드에서 펼칠 사제지간의 명승부는 명작을 완성하는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될 것 같다.

한편 이날 첫 만남에서는 제자가 이끄는 SK가 kt에 14-2로 대승을 거뒀다.


조범현은? ▲생년월일=1960년 10월 1일 ▲출신교=대구초∼대건중∼충암고∼인하대 ▲키·몸무게=177cm·80kg ▲프로경력=OB(1982∼1990년)∼삼성(1991∼1992년) ▲지도자 경력=쌍방울 코치(1993∼1999년)∼삼성 코치(2000∼2002년)∼SK 감독(2003∼2006년)∼KIA 코치(2007년)∼KIA 감독(2007∼2011년)∼삼성 인스트럭터(2013년)∼kt 감독(2014년∼) ▲통산성적=615경기, 타율 0.201(1091타수 219안타), 12홈런, 107타점 ▲2014년 연봉=4억원


박경완은? ▲생년월일=1972년 7월 11일 ▲출신교=전주중앙초∼전주동중∼전주고 ▲키·몸무게=178cm·88kg ▲프로경력=쌍방울(1991∼1997년)∼현대(1998∼2002년)∼SK(2003∼2013년) ▲통산성적=2043경기, 타율 0.249(5946타수 1480안타), 314홈런, 995타점 ▲지도자 경력=SK 2군 감독(2014년∼) ▲2014년 연봉=1억원

수원|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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