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가난 벗겠다는 간절함…산 정상에 다시 올린 바윗돌

입력 2016-04-1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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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점암면 모룡리 봉화산 정상의 중바위 모습. 맨 위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 뒤 인근 모동마을의 살림살이가 좋지 않아지자 마을 사람들이 이를 다시 올려 놓으면서 어려움에서 벗어났다는 민담이 전해져 내려온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5. 점암면 모룡리 모동마을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매월 격주 총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1945년 해방 되던 해
힘자랑하던 장사, 관석 떨어뜨리고…
그 후 더 심해진 마을 흉년
삶의 절박함으로 다시 올린 관석
“그때부터 술·도박이 사라져부렀어”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에서 수많은 청춘이 흔들리고 있다. 청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도 아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개천의 용’도 이제는 나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무언가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고 개선하지 않는 한, 안온한 삶을 저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실로 현실의 불안은 꿈을, 아니 세상을 잠식하고야 만 것일까. 가난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신작로를 내고 허툰 땅을 개간하며 땀 흘린 세대의 수십여 년 전 고통스러웠던 수고도 헛일이 된 것일까.


● 굴러 떨어진 바위

한때 사람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을 마시고 화투짝을 잡았다. 잔뜩 취해 어지러운 주사(酒邪)와 대박 한 몫의 욕망을 채워주기는커녕 그저 소일거리였을 뿐인 도박마저도 이내 폭력을 몰고 왔다. 밤이면 싸움 그칠 날이 없었다. 낮이면 술에 취해, 밤이면 도박에 이지러지며 사람들은 그래도 꾸역꾸역 가난을 살고 있었다. 그저 아침이면 해를 맞이할 뿐이고, 밤이면 달과 함께 기울며 취할 밖에.

죽은 이의 묏자리를 봐주기 위해 보성에서 마을을 찾아 들어선 풍수쟁이 배씨의 시선에는 그 하릴없는 일상의 원인이 단박에 들어왔다. 마을 앞 봉화산과 맨땅이 이어 붙은 입구에 떨어진 큰 바위 탓이라고 풍수쟁이 배씨는 생각했다.

“아, 이 마을이 관석을 굴러 부러서 이리 되야 부렀다. 빨리 올려서 원상복구해주먼 마을이 괜찮겄다.”

사람들은 힘을 모았다. 바위를 잇단 장목에 걸쳐 놓고 산을 올랐다. 산은 민둥산이어서 나무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화선을 이으려 관(官)이 베다 놓은 나무, 간척을 하느라 흙을 퍼나르던 토차의 레일에 깔았던 침목이 쓰였다.

1960년대 말이었다.


● 해방의 힘자랑…, 그러나

바위는 원래 봉화산 정상에 있었다. 스님이 바랑을 메고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모양새의 중바위에 걸쳐진 관석(사람의 머리 위에 갓처럼 올려져 있다 해서 그렇게 불렸다)이었다.

“힘깨나 쓰는 임 장사가 있었어. 아주 덩치도 크고 호걸로 생겼어. 이 양반이 저그 올라가가지고 등을 바위에 대고 확 밀어제끼니께 이 산 맨 아래까지 굴러와버린 거여. 힘자랑을 해분 거제.”

봉화산에 함께 오른 모동마을 신순식(76) 이장은 허허 웃었다. 토끼가 뛰어오르는 모습까지 훤했던 민둥산엔 나무가 심어져 자라났다. 빼곡한 숲을 헤쳐 오르며 미끄러져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길 몇 차례. 길도 나지 않은 산을 10여분 오른 뒤였다.

신 이장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이제는 고추와 고구마와 도라지가 자라나고 있는 너른 들밭과 마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는 잘 사는 동네였는디, 이 관석이 내려 앉아분 뒤부텀서 어짠지 형편이 안 좋아부렀어.”

마을 사람들은 보성 풍수쟁이 배씨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풍수와 점술에 가까운 관망에 기대서라도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그래도 아직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저 길가에 떨어진 바위가 착 자리에 앉듯이 딱 앉었어. 아, 바람이 불어도 안 떨어졌는디.”

1945년, 해방을 맞은 해였다.

스님이 바랑을 메고 시중을 청하는 형상의 중바위(오른쪽)가 자리한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모룡리의 들판 전경.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바위와 함께 삶을 올랐다

오랜 민담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신 이장은 “실화”라고 말했다. “설화가 아니고 실화여”라고 강조하면서.

임 장사는 힘자랑으로 해방의 기쁨을 드러냈다. 하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흥군 점암면은 군내에서 가장 높은 팔영산(608m)을 세우며 고래의 구릉에 사람들의 터를 형성한 곳이다.

그만큼 개간의 손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십시일반했다. 가난했던 시절, 보리쌀을 모으기도 했다. 1km에 달하는 농로도 일궜다. 지게 밖에 없던 시절이었지만, 기계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을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우연인지 뭔지는 몰라도 잘 살아보자는 의욕이 있었다”고 신 이장은 돌이켰다.

도박과 술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농한기 농로를 닦느라 바빴고, 하나둘 공동의 작업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저녁에 화투칠 겨를이 없”었다. 누에를 치고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땅을 비옥케 할 퇴비를 떴다. 가구당 10가마 넘는 쌀빚도 조금씩 정리돼 갔다.

바위를 올려놓기 위해 힘을 모아 올랐던 민둥산에 하나둘 나무가 늘어가면서는 그 곳에 길을 내는 것도 잊었다. 신 이장은 “배고파서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디, 등산 같은 건 생각도 못혔다”면서 질긴 삶의 의욕을 지켜내려던 시절을 얘기했다.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 바위를 올리며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궁핍한 세상살이를 견뎌낼 힘을 거기서부터 얻었을 터이다. 마침내 바위를 ‘스님의 머리’에 갓처럼 씌어 올려놓고는 “밤새 춤추고 꽹과리를 치며” 마치 주술의 축제로 부자 되기를 기원한 것도 그런 절실함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인 1969년의 일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절실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 절실함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의 불안과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어려운 일상의 우려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섣불리 절실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봉화산 정상, 바윗돌이 심상찮은 무게로 눈에 들어 앉았다.

고흥(전남)|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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