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한 지 벌써 20년이 됐다는 걸 생각 못 하고 있었어요. 근데 20년이나 했다고 인식하는 건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건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연기와 연륜이 비례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나태해지면 안 되는 게 바로 배우니까요.”
배우 인생 20년을 맞은 김명민이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이하 특별수사)’에 출연했다. ‘특별수사’는 세간을 뒤흔든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두고 브로커와 변호사 콤비가 수사에 나서는 작품이다.
‘특별수사’는 당초 개봉일보다 늦춰진 지난 16일에 개봉했다. 개봉일이 미뤄졌지만 지방 무대인사까지 돌며 고비를 늦추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개봉일이 거의 한 달 정도 미뤄졌어요. 처음엔 ‘굳이 늦춰야하나’ 했는데 ‘곡성’이랑, ‘시빌워’가 잘 되는 걸 보고 잘했구나 싶었어요. (웃음) 감독님과 함께 지방 무대인사까지 진행하면서 차근차근 순서를 밟았어요.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 일반 시사회로 ‘특별수사’를 보셨기 때문에 입소문도 더 퍼진 것 같아요. 시사회 이후에도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러한 반응은 흥행 스코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21일 영진위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특별수사’는 지난 20일 6만 7959명의 관객의 동원하며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누적 관객수는 60만 5834명이다.
“시나리오가 너무 재밌더라고요. 시나리오 자체에서 오는 재미와 캐릭터 간의 플레이가 정말 좋았어요. 무조건 강자와 약자의 대립구도가 아닌 철저한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극의 흐름이 매력적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빠지면 설명이 안 되는 영화죠. 감독님이 ‘어떻게 이렇게 굴비 엮듯 유기적으로 연결했지’ 싶었어요.”

극중 김명민은 전직 경찰이자 현재는 변호사(성동일 분) 사무실에서 일하는 업계 최고의 브로커 필재 역을 맡았다. 그는 능청스러우면서도 때론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극을 이끌어나간다.
“감독님이 최필재 캐릭터를 변호사 같은 사무장으로 재밌게 만들었어요. 속에 담고 있는 건 많지만 그걸 누르는 사람이랄까요. 툭툭 내뱉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뼈 있는 말을 많이 하죠. 한 달 안에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필재가 왜 속물근성의 브로커가 됐을까’의 과정을 숙지하고 연기하는데 주력했어요.”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호재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개봉이 늦춰지고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약간의 걱정도 있었다. 거대 재벌과 소수의 맞대결이라는 소재가 자칫 관객들에게 무겁고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화가 약간 무겁고, 칙칙한 부분이 있었죠. 등장인물도 다 남자잖아요. 근데 기술 시사 때 본 영화는 찍을 때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장점은 완전히 뽑아내고, 단점은 다 제거했더군요. 감독님이 스피디한 진행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편집을 통해 다 정리하셨더라고요. 상호 형(김상호)이랑 기술 시사를 보면서 200% 만족했어요.”
권종관 감독과 함께 작업하며 있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김명민은 제작보고회부터 언론 시사회까지 줄곧 권종관 감독에 대해 ‘세세하고 꼼꼼한 감독’이라고 표현했다.
“감독님이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제일 싫어하세요. 더 찍고 싶은데 수고했다는 말로 촬영이 끝나는 게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멈출 때가 됐는데도 절대 ‘컷’을 안 외쳤어요. ‘모니터를 보다가 연기에 너무 빠져서 컷을 외칠 수 없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시더라고요. (웃음)”
김명민은 그동안 악역보다는 극을 주도하는 선역을 주로 맡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영화 ‘조선명탐정’, ‘연가시’ 등에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영웅의 아우라를 발산했다.
“아무래도 맡은 배역 덕분에 영웅 이미지가 생긴 게 아닐까요. 제가 ‘불멸의 이순신’을 찍고 나서 정치·정계 제의를 많이 받았어요.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을 1년 동안 하다 보니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면서 착각에 빠지셨던 것 같아요. 당시 지인들끼리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순신 끝나고 안중근 의사 역 맡으면 동장 정도는 나와도 되지 않겠냐’고 말했죠.”

그렇다보니 지금까지 맡은 배역들도 평범함을 거부한 하나같이 독특한 캐릭터였다. 장군, 의사, 대통령, 마에스트로 등 굵직한 배역들을 통해 특정 직업군을 연기하기도 했다.
“남자 3대 로망이라고 하는 마에스트로, 장군, 대통령을 모두 경험했어요. 다음에는 뭘 할 지 생각하고 있는데 양아치 브로커를 했네요. 하이 포지션에서 조금씩 내려가는 것 같아요. (웃음) 다음에는 느와르 장르를 해보고 싶어요. 아니면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다중인격 연기를 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한 분야에서 20년이 넘도록 일을 한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20년 동안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김명민은 스스로 격려보다는 겸손함을 드러냈다. 김명민은 일명 ‘연기 본좌’라는 수식어에 대해 ‘부끄럽고 민망하다’며 솔직하게 답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수식어죠.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연기 정말 잘하는 분에게도 그런 말을 안 하는데 제게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가요. ‘하얀거탑’ ‘불멸의 이순신’에 ‘베토벤 바이러스’까지 운 좋게 연타를 날리다보니 굳혀진 게 아닌가 싶어요. 그냥 배우 김명민, 연기 잘하는 배우 정도면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 생각해요.”
동아닷컴 장경국 기자 lovewit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