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친정팀 서울 이랜드FC에서 사령탑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박건하 감독(왼쪽 끝)은 “나도, 선수도, 팀도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는 바람을 드러냈다. 사진제공| 한국프로축구연맹
“과감한 전진 축구, 몸싸움도 강하게
수비의 유혹 있어도 지금은 아니다”
현장 축구인은 통상 두 가지 길을 걷는다. 현역으로 뛰다 지도자의 삶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그런데 특정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가 같은 팀에서 지도자의 길을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K리그 챌린지(2부리그) 서울 이랜드FC의 박건하(45) 감독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1994년 실업축구 이랜드에 입단한 그는 올 6월 프로축구 이랜드의 제2대 사령탑으로 취임했다. 무대는 다르더라도 축구인생의 ‘홀로서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팀이 똑같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창단 사령탑 마틴 레니 전 감독의 바통을 물려받은 ‘구원투수’지만, 박건하 체제의 이랜드는 내년 시즌 클래식(1부리그) 승격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의 한 리조트에 마련된 클럽하우스에 거주하며 치열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박 감독은 당찬 포부보다는 “나도, 선수도, 팀도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는 잔잔한 바람을 전했다.
-진정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국가대표팀 코치로 있을 때 제의를 받아 고민이 컸다. 분명 설레는 도전이고, 특별한 감정이었지만 울리 슈틸리케(62·독일) 감독님께 ‘이랜드로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을 때, ‘감독의 기회가 많지 않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좋은 감독이 되길 바란다’는 말씀으로 허락하셨다.”
-가족 앞에서 매 순간이 시험대인데.
“열한 살짜리 딸이 ‘우리 가족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겠네’라는 감정이 생긴 것 같다. 숙소 생활을 하다보니 집에 있는 시간도 짧다. 벌써 눈치로 분위기를 알더라. 아내도 그렇다. 현역 때부터 내가 속한 팀의 모든 경기를 관전한 아내가 ‘이제 경기장에 못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스트레스가 생긴 것이다. 아직은 이 느낌이 익숙하지 않다. 특히 선수단 개편, 컨디션 관리, 경기 운영까지 한꺼번에 이뤄지는 시점이라 정말 버겁다. 그래도 내가 택한 길이다. 한 팀에서 선수, 감독 타이틀을 모두 달았으니 행복한 사람 아닌가.”
-이전과 지금, 어떤 부분이 가장 달라졌나.
“더 이상 조언자가 아니다. 책임지고 결정하는 위치가 됐다. 부담도 크고 어깨도 무겁다. 많이 바쁘다보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사라졌다. 물론 주변에서 보는 눈도 많아졌고.”
서울 이랜드 FC 박건하 감독.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아무래도 ‘감독’보다 ‘코치’라는 호칭이 익숙하다. 프로에서의 친정팀인 수원삼성의 2군 코치로 있던 그는 2012런던올림픽을 준비하던 ‘홍명보호’ 코칭스태프의 일원으로 대표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2014브라질월드컵을 치렀고, 2015호주아시안컵과 2018러시아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까지 소화했다. 그러나 떠나야 할 길이 있었다. 감독으로서의 걸음. 외롭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꼭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선수단에는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해줬는지.
“좋은 선수와 좋은 지도자. ‘난 너희에게 좋은 감독이 될 테니, 너희는 좋은 선수가 돼주길 바란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100% 만족은 못해도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다만 좀더 투지를 보여주길 바란다.”
-자신이 생각하는 감독의 이상향은?
“어릴 적 축구를 하면서 ‘성공 못 하면 밀항하겠다’란 생각을 했다. ‘내가 못하면 우리 부모님, 내게 기대를 걸어주시고 믿어주신 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런 간절함이 나를 키웠다. 우리 선수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았으면 한다. 또 박건하를 만나 지금보다 더 좋은 위치, 높이 성장해줬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사람처럼 값진 인생이 또 있을까 싶다.”
본인도 좋은 스승을 만나, 또 좋은 지도자들을 통해 나름 괜찮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인연을 맺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대 최고로 이름을 떨친 이들의 신뢰와 믿음을 받으며 본인도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이제 이랜드에서 자신이 그 역할을 하려고 한다.
-이랜드에서 구현하고 싶은 축구는 무엇인가.
“승패 이상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축구, 매력적인 축구를 하고 싶다. 축구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몸싸움도 강하게 하고, 과감히 전진할 줄 아는 팀으로 만들고자 한다. 물론 패배의 부담이 커지면 수비의 유혹도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감독들의 똑같은 딜레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도전이 필요하다.”
청평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