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김소현. 스포츠동아DB
김소현이란 배우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우아함의 향기다. 그윽하고 달콤한 데다 상냥하기까지 하다. 굳이 입을 열어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김소현과 함께 하는 시간은 참 아름답게 흐른다. 물론 무대에서다.
김소현이 11월26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팬텀’에서 크리스틴 다에 역을 맡았다. 김소현은 ‘크리스틴’의 화신 같은 배우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하 오유)’ 한국 초연 때 크리스틴에 발탁된 이후 250회 이상 크리스틴으로 무대에 섰다. 김소현은 “초연 때 7개월, 재연 때는 1년 이상. 그 밖에 방송이나 콘서트, 행사까지 포함하면 나도 셀 수 없을 정도다”라며 멋쩍어 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틴은 또 다르다. ‘오유’이 아닌 ‘팬텀’의 크리스틴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원작은 프랑스의 추리소설가 가스통 르루가 쓴 소설이다. 그러니까 같은 원작에서 태어난 다른 작품이다. 당연히 크리스틴도 닮은 듯 다르다.
“작품부터가 너무 다르다. 처음엔 낯설어서 힘이 들었다. ‘오유’의 크리스틴이 여성스럽고 청초하고 가련한 쪽이라면, ‘팬텀’의 크리스틴은 활달하고 똑똑하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헤쳐 나갈 줄 아는 사람이다. 저쪽이 공주라면 이쪽은 사람이랄까. 좀 더 인간적인 크리스틴?(웃음)”
주인공인 팬텀도 다르게 그려진다. 김소현에 따르면 ‘오유’의 팬텀이 공포와 신비감에 무게가 실렸다면, 이번 팬텀은 좀 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같은 팬텀’이다. 김소현은 “처음 대본 리딩을 할 때 팬텀이 말이 너무 많은 데다 농담까지 해서 놀랐다”고 했다. 실제로 뮤지컬 ‘팬텀’에서는 ‘오유’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팬텀의 어린 시절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 크리스틴 독점배우의 15년 내공에 거는 기대
‘팬텀’에는 김소현의 남편 손준호가 필립 드 샹동백작으로 출연한다.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훈남 귀족청년 역이다. 손준호는 ‘오유’에서도 샹동백작과 동일인물인 라울 역을 맡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소현에게 프러포즈할 수 있었다.
“아우! 정말 같이 안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지금까지는 같은 작품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날에 공연했다. 제대로 같이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 망했다’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하면서 김소현 본인도 놀랐단다. 샹동백작이 무릎을 꿇고 장미를 건네는데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로 보였던 것이다. 김소현은 그제서야 “김치찌개 때문에 엎고 싸워도 이 작품은 할 수 있겠다”라며 안도했단다.
김소현은 ‘팬텀’ 첫 연습이 시작되기 전 손준호와 약속을 했다. ‘호칭은 서로 ○○씨로 부를 것’, ‘가급적 연습실에서는 대화하지 않을 것’, ‘회식자리는 따로 갈 것’ 등이 포함된 지침서를 남편에게 건넸다. 김소현은 “10가지 지켜야 할 경계를 마련해 드렸으나 영 안 지키고 계신다”며 웃었다.
뮤지컬 배우 김소현. 스포츠동아DB
뮤지컬 ‘팬텀’에서 김소현이 아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오페라극장 지하 미궁에서 팬텀과 크리스틴이 피크닉을 하는 장면이다. 어린 팬텀을 위해 엄마가 마련해 준 장소다. 이곳에만 오면 김소현은 눈물이 멈출 수가 없다. 지금은 나오는 대로 둔다.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가는 장면에서는 연출자가 자제를 요구할 정도로 ‘벅벅’ 소리를 지른다. ‘연습 때 갈 데까지 가 봐야 한다’는 김소현의 연기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가면서 감정을 깎고 또 깎는다. 그래야 막이 올라갔을 때 감정과 연기, 노래를 모두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음악도 무대도 화려하고 좋지만, 분명 가슴을 울리는 작품입니다. 팬텀과 크리스틴의 아픔과 기쁨을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틴 전문배우’를 넘어 ‘크리스틴 독점배우’의 경지에 오른 듯한 김소현. 누군가는 크리스틴의 아름다움을, 누군가는 크리스틴의 청순함을, 누군가는 활달함과 강인함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소현이 아니라면 그 누가 있어 크리스틴의 우글쭈글한 아름다움의 진짜 삶의 결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15년은 그런 시간이다. 돈과 분칠만으로 다다를 수 없는, 진정한 우아함이 그러한 것처럼.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