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전 해태가 외면했던 김기태, KIA 감독으로 우승 한을 풀다

입력 2017-10-3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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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김기태 감독이 3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KS) 5차전에서 7-6으로 이겨 4승1패로 우승한 뒤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김 감독은 선수, 코치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KS 우승의 염원을 감독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이뤘다. 잠실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엔 가시처럼 박혀 있는 한(恨)이 하나쯤은 있다. KIA 김기태(48) 감독도 마찬가지다. ‘우승 한 번 못해 본 스타’라는 낙인. 그것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아픈 그림자였다.

1991년 쌍방울에 입단한 것이 어쩌면 우승과 연이 닿지 않는 기찻길로 들어선 불운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1차지명을 놓고 해태 김응룡 감독은 구단의 숙원이나 마찬가지인 광주 출신의 왼손 거포 김기태(광주일고~인하대 출신)를 강력하게 원했지만, 구단은 오희주(광주진흥고~한양대 출신)가 장차 10승 투수로 성장할 미완의 대기라고 판단했다.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흔들었다. 이후 오희주는 1992년 5월 임의탈퇴로 처리되면서 1승도 올리지 못하고 해태를 떠났고, 1993년 LG에 입단해 1995년 뒤늦게 첫 승을 올렸지만 그해를 끝으로 통산 3승4패2세이브의 성적을 남긴 채 유니폼을 벗었다.

고향 팀의 외면을 받은 김기태는 전주로 가야했다.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쌍방울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입단 첫해 KBO 역대 왼손타자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인 27개의 아치를 그렸다. 이듬해엔 좌타자 최초 30홈런 고지(31홈런)를 넘어섰다. 홈런왕(1994년)에도 올랐고, 타격왕(1997년)도 차지했다. 골든글러브(1992~1994년 지명타자) 단골손님이 됐다. 그러나 비운처럼 소속팀 쌍방울은 단 한 번도 우승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사이 해태는 1993년, 1996년, 1997년 우승을 이어가며 타이거즈의 전설을 쌓아나갔다.

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2017 타이어뱅크 KBO리그‘ KIA 타이거즈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가 열렸다. KIA가 두산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김기태 감독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잠실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IMF 외환위기로 모그룹 쌍방울이 휘청거리면서 그는 1998년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트레이드 소식을 접했다. 대구로 가야했다. 당시 삼성은 우승이라는 숙원을 풀기 위해 김기태와 전년도에 구원 20승을 달성한 투수 김현욱까지 영입하면서 쌍방울에 양용모와 이계성에 현금 20억원을 넘겨줬다. 하지만 삼성에게도, 김기태에게도 우승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1999년과 2000년엔 플레이오프(PO)에서 롯데와 현대에 무릎을 꿇었고, 2001년엔 한국시리즈(KS)에서 두산에 밀렸다.

김기태는 다시 인천으로 넘어갔다. 2001년 12월 20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6대2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었다. 운명일까. 그가 떠난 뒤 공교롭게도 삼성은 2002년 첫 KS 우승의 한을 풀었다. 김기태는 SK에서 2003년 KS에 올랐지만 현대에 7차전 승부 끝에 패하면서 준우승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우승반지를 끼지 못한 채 2005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하늘은 또 장난을 하듯 2년 후인 2007년 SK에 첫 우승을 선사했다.

26년 전 해태의 외면을 받았던 김기태는 먼 길을 돌고 돌아 3년 전 고향 팀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닿을 듯 닿지 않았던 연을 KIA 사령탑으로 맺을 수 있었다. 난파선이 된 KIA호의 선장을 맡은 그는 단 3년 만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KS 우승을 이끌었다.

2017년 10월 30일 잠실구장. 김기태는 우승이 확정되자 가을단풍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어리고 서린 한을 토해내듯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심장 한 구석에 깊숙이 박혀 있던 모진 가시도 눈물과 함께 씻겨나가는 순간이었다.

잠실 | 이재국 전문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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