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토크] ‘DMZ1584’ 최일화 “억대 제작비 떠안은 이유…약속했으니까”

입력 2017-12-06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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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에 첫눈이 내린 날, 배우 최일화를 만났다.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도착한 곳은 삼성동 빌딩 지하에 임시로 마련된 연습실. 최일화를 비롯한 10여명의 배우들은 연극 ‘DMZ1584’(김광탁 연출)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연습도 실전처럼 대사 하나, 노래 한 소절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열연했다. 눈 내리던 대낮에 시작한 연습은 그렇게 새벽까지 이어졌다.

최일화가 기획한 ‘DMZ1584’는 지난 2015년 8월 4일 DMZ에서 일어난 목함지뢰 폭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김정원·하재헌 중사가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게 된 실제 사건과 뜨거운 전우애를 주 내용으로 한다. 2016년 초연에 이어 올해는 대전 계룡대와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2015년에 우연히 실제 사건을 접하게 됐어요. 기획을 제안 받은 후 연극배우들을 모아 작은 연극으로 만들어봐야겠다 싶었죠. 당시 후원자가 있었는데 무대를 올리기 3일 전에 갑자기 미국으로 갔어요.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됐죠.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았어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죠. 그런데 밤마다 꿈에 아들뻘 동생뻘인 작전 팀원들이 나타나서 ‘선생님. 무대 꼭 올려주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약속한 거니까.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최일화가 한순간 떠안은 제작비는 억대를 넘어섰다. 그는 드라마와 영화 개런티와 음반 제작 등 쉴 새 업이 발품 팔아 메웠다. 여전히 상황은 여의치 않지만 올해도 그는 ‘DMZ1584’를 무대에 세운다.

“공연을 본 분들은 매년 공연을 올려줬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한 장군은 ‘30년 동안 군대에 있었지만 부대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병사들을 먹먹하게 해준 연극은 처음이었다. 실제 문제를 다뤄줘서 고맙다. 연극을 통해 잘 추스르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증오가 아니라 화합과 평화예요. 먼저 상처받은 병사들을 연극을 통해 위로하고 치유하고 싶었고요. 더불어 우리가 안은 문제를 내 것, 내 일로 만들어서 직시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공론화 해야죠.”

드라마와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최일화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연극배우”라고 강조했다.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일화. 그는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연극으로 치유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DMZ1584’뿐 아니라 이전 연극도 그의 생각과 맞닿아있다. 학교 폭력을 담은 연극 ‘친구야! 미안해’. 이 작품 또한 없는 돈을 모으고 사비를 털어서 8개 학교에서 공연했다.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연극배우들과 함께.

“우리 배우들은 연극에 인생을 던진 아이들이에요. 후배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드라마와 영화는 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매체가 그 사람을 상품으로서 필요치 않아하면 평생 설 수 없는 곳이잖아요. 97%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20년 40년 기다리기만 하고 있죠. 기회가 일찍 올 수도 있지만 한 번도 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요.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후배들을 위해서, 그들의 배우 인생을 하루라도 연장시켜주기 위해 힘이 되고 싶어요. 저도 20여년을 하염없이 기다린 사람이니까요.”


최일화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명시절을 회상했다. 20년 이상의 기나긴 무명시절의 일부를 기억에서 꺼냈다. 1993년 대전 실내체육관에서 마당극을 하던 시절이었다.

“연기를 잘 못했어요. 제가 쓰일 배우가 아닌데 가정이 있다고 억지로 조그만 배역을 만들어주셨죠. 소리치면서 연기하는데 누가 저를 툭툭 치더라고요. 상대가 저를 배우로서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툭툭 치더니 ‘아저씨. 대사 하지마요. 반응 썰렁하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고개를 돌아보니 학생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공연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무대를 끝낸 후 그 학생을 찾아다녔는데 안 보이더라고요. 만약에 그때 제 문제를 알았다면 무명시절이 그렇게 길어지진 않았을 텐데…. 연극의 신이 나에게 보낸 신호였을 지도 모르죠. 그 친구의 말을 40대가 되어서야 알았어요.”

1980년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최일화에게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20대 초반 최일화는 연기와 연극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 찬 청년이었다.

“제대 후 악기 염색 신발 탄광 등 공장을 다녔어요. 부모님이 아프신데 사남매에서 장남이라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죠. 부모님 약값으로도 동생들 학비로도 부족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김갑수 형이 나오는 연극을 봤어요.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져서 연극을 시작했죠. 스물셋에 연극을 시작했는데 대사를 못하다보니 초대권 뿌리고 포스터 붙이러 다니곤 했죠. 음향 조명 미술 의상도 맡고요. 그런 일을 20여년 했어요. 배우로서 노력했으면 나았을텐데 배우의 기능보다는 다른 기능이 많았죠. ‘너는 대기만성형이야’라는 말을 믿었어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진짜 열심히 했어요. 누군가는 연극쟁이가 아니라 세트쟁이라고 놀렸지만요. ‘언젠가는 무대에 설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어요. 바보 같았죠.”


우직했다. 어쩌면 미련했다. 낮에는 연극을, 밤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하면서 버텼다. 한겨울 리어카 밑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잠을 떨치기 위해 옷핀으로 제 몸을 찌르고 진한 커피를 4-50잔씩 마셨다고 고백했다.

“남대문에 있는 청소 업체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했어요. 새벽에 리어카 엎어놓으면 그 밑에서 자고. 겨울에는 추운 정도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이불이 얼어서 펴지지 않을 정도죠. 그렇게 잠깐 자고 연극하러 가서는 포스터 붙이고, 무대가 끝나면 막 내리고 청소하고 남대문에 가서 청소하고. 어느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서 사는 거지?’ 싶었어요. 뚜렷한 목표가 없어진 거예요.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고 동생들 인생이 나아지지도 않았고. 연극에 인생을 걸었으니 연극과 대결해보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최일화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께 동생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러면서 연기에 도전한 지 10년 만에 대사 있는 역할을 맡았던 날을 떠올렸다. 아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말에 감동 에피소드를 예상했지만 뜻밖의 깨우침을 얻은 일화였다.

“아내가 제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막 흘리더라고요. ‘이제 배우로 시작이야’라고 했더니 계속 울어요. 그러더니 한 마디 하더라고요. ‘배우가 중요한 게 아니야. 당신은 왜 집에서 쓰는 말과 무대에서 쓰는 말이 똑같아?’라고요.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어요. 23년을 일반 사람처럼 무대에서 말하고 있었던 걸 몰랐거든요. 그때부터 밤새면서 연습했어요. 낮에는 연극하고 밤에는 찹쌀떡 장사를 했고 새벽 3~4시가 되면 산과 강에서 홀로 연습했어요. 배우 수업을 마흔 넘어서 처음 시작한 거죠. 모두 아내 덕분이에요.”


그런 최일화가 매체로 무대를 넓힌 건 2000년 전후였다. 영화는 1999년 ‘이재수의 난’이었고 드라마는 2003년 ‘야인시대’. 평생 연극 하나만 파겠다고 마음먹었던 최일화의 마음을 돌린 건 김갑수였다.

“두 작품 다 오디션을 보기 싫었는데 억지로 끌려가서 했어요. 당시 (김)갑수 형이 대본을 계속 가져다줬어요. 형이 ‘너 정도면 충분해. 걱정하지 마’라고 하는데도 저는 ‘그들이 인정해서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닌데 내가 왜 하느냐’고 했어요. 의절할 뻔 했어요. 형도 서운했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두 번째 디딤돌은 이재규 감독이었다. 최일화는 이 감독을 언급하면서 “나에게 봄날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연극 ‘삼류배우’을 본 관계자가 저를 캐스팅했어요. 대본을 받았는데 세 시간 동안 계속 대본만 보고 있었어요. 그때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배역 오디션을 본다면 평생 영화 드라마 안 해도 괜찮아’. 당시 연탄 떼는 성북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별똥별을 봤어요. ‘나 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죠. 몇 초 후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고 그렇게 감독님을 만났어요. 고맙죠. 연극의 신이 기회를 준 것 같아요. 이재규 감독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독이에요.”


최일화가 매체에서 번 돈은 연극으로 흐른다. 그는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건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 ‘고향’인 연극에 재투자하기 위해서”라고 소신을 밝혔다. 본인처럼 어려운 사람이 또 나오지 않게 하라는 ‘연극의 신’의 뜻이라면서. 그러면서 최일화는 무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뭉클한 조언을 남겼다.

“기초를 다지고 죽을 만큼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와요. 사람들은 죽을 만큼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죠. 저는 경험해봤어요. 공연 연습하다 혀가 말리고 온몸이 뒤틀어지더라고요. 응급실로 바로 실려 갔죠. 제가 체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많이 이야기하려고 해요. ‘죽을 만큼 해보셨나요. 시늉이라도 해보십시오. 그럼 그 분야의 신이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라고요.

1%의 영감도 없던 놈인데 그런 놈도 죽을 만큼 하니까 이렇게 됩니다. 죽을 만큼 하되 재밌게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연극하면서 즐겁지 않고 힘들었어요. 지금도 연극과 싸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 같은 사람은 안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죠. 죽을 만큼 힘을 다해 재밌게 하는 것.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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