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종료 후 복기를 하고 있는 이세돌 9단(오른쪽)과 커제 9단. 사진제공 ㅣ 한국기원
실수로 승부 오락가락…인간바둑의 묘미
13일 제주 서귀포시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에서 열린 이세돌 9단과 중국 랭킹1위 커제 9단의 대결은 이세돌의 한 집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한국기원과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현대차의 공조로 성사된 이날 제주대국은 한국과 중국 양국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대국은 TV, 인터넷을 통해 동시 생중계 됐고 해비치 로비에 마련된 공개해설장에는 관람객들로 들어찼다.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에서 ‘이세돌’, ‘커제’ 키워드는 1위를 비롯해 종일 상위권에 머물렀다.
두 사람에게는 한중을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 프로기사라는 점 외에 중요한 공통분모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해 본 세상 유이(唯二)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세돌은 2016년 알파고에게 1승 4패를 했고, 이세돌의 패배를 보며 “나라면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 큰소리 쳤던 커제는 이듬해 5월 알파고와 대결해 3전 전패를 당한 뒤 눈물을 흘렸다. 커제와 대국한 ‘알파고 마스터’는 이세돌이 상대한 ‘알파고 리’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대국은 ‘명국’은 아닐지 몰라도 ‘명승부’임에는 분명했다. 흑을 쥔 이세돌은 초반을 주도했다. 하지만 우변에서 큰 실수(117)를 하는 바람에 흐름은 백에게 넘어갔다. 형세가 기울자 이세돌이 판을 격렬히 흔들기 시작했다. 커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TV중계를 하는 대국의 경우 카메라가 위에도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대국자가 수를 읽느라 바둑판 앞으로 상체를 숙이는 일은 암묵적 금기이다. 머리가 화면의 바둑판을 가려 시청자들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종종 금기를 깨는 커제였지만 이날 시청자들은 커제 9단의 뒤통수를 실컷 봐야 했다.
수읽기를 할 때 독특한 습관이 있는 기사들이 있는데 커제는 심각해지면 ‘속알머리’를 배배 꼬기 시작한다. 눈이 날카로운 시청자들은 바둑판과 주변에 우수수 흩날린 머리카락의 잔해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큰 바꿔치기와 치열한 패싸움이 벌어지면서 바둑은 급박하게 흘렀다. 이세돌의 불리를 점치던 TV, 인터넷 해설자들의 입에서 ‘반집승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 실수(백196)는 커제의 손끝에서 나왔고, 상금 3000만원과 부상은 이세돌 앞에 놓였다.
이날 이세돌과 커제가 보여준 바둑은 ‘인간의 바둑’이었다. 인간의 수들은 비록 인공지능처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더없이 짜릿한 재미와 감동의 드라마를 보는 이들에게 선사했다. 차가운 얼굴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이세돌), 머리를 쥐어뜯는 수읽기의 고통은 알파고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알파고 간의 대국을 다수 관전했던 한 바둑관계자는 “한쪽이 불리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축구로 치면 먼저 한 골을 넣는 팀이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역전은 없다”라고 했다.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아름다웠던 인간의 바둑. 국후 이세돌은 웃으며 말했다.
“바둑은 인간과 인간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둑의 본질에 좀 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귀포 |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