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데이즈’를 연출한 윤재호 감독. 프랑스에서 영화를 시작한 그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관객에 내놓고 있다. 사진제공|페퍼민트앤컴퍼니
영화 ‘뷰티풀 데이즈’를 통해 장편 극영화에 데뷔한 윤재호(38) 감독이다.
‘뷰티풀 데이즈’는 이나영의 복귀작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그만큼 주목받아야 할 존재가 더 있다. 윤재호 감독이다. 20년 가까이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자양분으로 흡수한 그는 단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연출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온 연출자이다. 2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서 처음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마담 B’를 통해 국내 영화계서도 주목받은 그가 2년 만에 장편 극영화를 내놓았다. 자유롭게 장르를 오가고, 작업의 속도 또한 상당히 빠르다.
‘뷰티풀 데이즈’ 개봉을 앞둔 윤재호 감독을 19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장편 데뷔작 공개를 앞두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선 긴장의 빛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설렘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설렘은 언제나 반갑다는 말도 덧붙였다.
윤재호 감독. 사진제공|페퍼민트앤컴퍼니
● “다큐도, 극영화도, 모두 시간과의 싸움”
감독은 ‘뷰티풀 데이즈’의 시나리오를 5년여 동안 쓰고 다듬었다.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주로 프랑스를 무대 삼아왔던 그에게 극영화 연출 기회는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2015년 인천다큐멘터리포트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제 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중이었어요. 묶고 있던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하러 갔는데 앉을 자리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모르는 분과 합석을 했죠. 그 때 앞에 앉은 분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됐고, 그 분이 지금 영화의 제작자입니다.”
‘뷰티풀 데이즈’는 ‘악마를 보았다’ ‘브이아이피’ ‘시간 위의 집’ 등 영화를 만든 페퍼민트앤컴퍼니가 제작했다. 감독과 제작자는 ‘아침 식당 만남’ 이후 작품을 함께 하자는 데 까지 뜻을 모았지만 이후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탈북한 여성을 주인공 삼아, 그녀가 중국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을 그린 이야기에 선뜻 투자한다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가 잘 되지 않아 1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작년에 이나영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촬영을 시작했고요. 원래 생각한 제목은 ‘엄마’였는데 촬영 마치고 편집하면서 지금 제목으로 바꿨어요. 뭐랄까. 아이러니를 주고 싶었어요. 반어법적이면서도 입체적인 느낌으로. 영화 엔딩과도 어울리고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다양한 시도 아래 관객으로부터 선택받는 경우도 많지만, 아직까지 다큐와 극영화를 활발히 오가는 연출자는 드물다. 때문에 윤재호 감독의 존재는 조금 더 특별하다.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두 장르를 경험하고 있는 감독은 “둘 다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짚었다.
“다르지만 각각의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둘 다 어렵다는 건 같고요. 하하! 다큐는 ‘우연’을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우연을 통해서 영화 한편이 완성되는 거죠.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고요. 극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메시지를 완성해가는 작업이에요. 그건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입니다. 늘 시간이 문제죠. 서로 다른,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뷰티풀 데이즈’는 중국 청년인 장첸이 14년 만에 엄마를 찾아 서울로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옌벤에 있는 아픈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꼭 보고 싶다고 말한, 엄마를 찾아 온 아들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엄마를 마주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가 몰래 넣어둔 일기장을 통해 아들은 엄마가 보낸 스산한 삶을 하나 둘 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나영은 이 영화를 통해 6년만에 연기활동을 재개했다. 더욱 깊어진 얼굴로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엄마라는 인물의 삶을 완성해냈다. 이나영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90% 정도 출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윤재호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나영 배우와 첫 만남이 굉장히 떨렸어요.(웃음) 제가 프랑스에 살 때 봤던 한국영화들에의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스크린에서 봤던 그 배우가 나를 만나자는데, 과연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싶었죠. 참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카메라를 비추는 방향마다, 달라지는 조명에 따라, 모습이 전부 달라요. 놀라웠죠.”
윤재호 감독은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늘 촬영감독과 동행했다. 두 사람은 촬영장 출퇴근을 공유하면서 ‘오늘은 이나영을 어떻게 담을지’를 두고 끝나지 않는 대화를 계속했다고 한다. “아침에 출발하면서, 촬영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음날은 또 어떤 이나영의 모습을 찍을지 그런 이야기를 쉬지 않고 나눴어요.”
감독과 이나영 역시 자주 대화를 나눴다. “작업할 땐 특히 배우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감독은 “배우가 연기를 하는 존재를 떠나 살아있는 생명체이니까, 그런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대화의 주제도 방대했다. 각자 취향대로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감독은 “이나영 배우가 예술영화도 좋아해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 얘기부터 덜 알려진 프랑스의 에릭 종카 감독 작품들도 보고 같이 이야기했다”고 돌이켰다.
윤재호 감독. 사진제공|페퍼민트앤컴퍼니
● “편견이 허물어질 때, 진짜 사람이 보인다”
‘뷰티풀 데이즈’는 주인공 엄마의 이야기다. 하지만 극의 화자는 아들이다. 아들이 바라보는 엄마의 삶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왜 아들의 시점을 택했는지 감독에게 물었더니 “편견”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지금의 10대 후반 혹은 20대에 해당하는 아들 젠첸의 시선을 통해 엄마를 보면서 어떤 편견에 대해 전하고 싶었어요. 아들이 가진 편견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바뀌잖아요. 영화가 중반으로, 또 후반으로 진행되면서 각각 인물들이 달리 보일 수 있어요. 그걸 바랐죠. 가족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이별 갈등 재회 오해 같은 상황은 저에게 늘 고민의 대상입니다.”
감독은 “누구나 사람을 만날 때 작게는 외모부터 사회적인 시선 혹은 자신이 가진 오해로 편견을 갖지 않느냐”며 “그런 편견이 허물어지면 그제야 실제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자각하기까지 어떤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나와 다른 이를 볼 때 갖는 편견을 허물고, 감정을 공유하는 일. 그걸 관객과 나누고 싶어요.”
윤재호 감독의 또 다른 활동무대는 프랑스다.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영화도 처음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달 문재인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 방문 당시 엘리제궁에서 열린 공식 만찬에 그가 초대됐다. 청와대 초청으로 이뤄진 참석인 줄 알았더니, 실제 사정은 조금 달랐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초청돼 부산에 있을 때였어요.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발신자가 엘리제궁인 게 있더라고요. 설마…. 처음엔 스팸메일인 줄 알았어요. 하하! 읽으면서도 ‘이건 스팸이 맞구나’ 했죠. 국가적인 사안에 저를 초대한다니. 그래도 혹시 몰라서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는 분을 통해서 청와대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초청장이 맞았죠. 부랴부랴 비행기표 끊어서 다녀왔죠.”
윤재호 감독은 그 만찬 자리에서도 역시 “사람”을 봤다고 했다. “그런 자리 속에서도 서로 신분이나 위치를 떠나,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걸 느꼈다”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그 관계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고 일어나지 않느냐”고도 했다.
감독의 다음 작품은 공포영화다. 다큐에서 극영화를 거쳐 이번엔 공포 장르의 도전이다. 그에게 경계란 없다.
“내용보다는 공포의 세계를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감독은 “우리 사회는 최고가 돼야 한다고, 완벽해야한다고 요구하지 않나. 그런 문제에 대해 직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려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나영과 관련한 질문 하나를 더 꺼냈다.
앞서 만난 이나영은 “윤재호 감독과 다음 영화를 또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소통하고 믿음을 나눈 배우와 감독의 신뢰가 묻어나는 대답. 이나영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윤재호 감독에게도 함께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지금 이나영 배우를 두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런데 배우가 응할지는 모르겠다.(웃음)”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