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불멸사랑’, 불멸의 가치를 바라보는 6인의 시선

입력 2019-03-03 16:4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다보면 바쁜 눈길을 ‘슥’하고 사로잡는 간판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지 건물 벽면 하나가 다 가려지는 것만 같습니다. 하얀 배경에 마치 궁서체 같은 글씨로 딱 네 자가 쓰여 있죠. ‘불.멸.사.랑’

“아하, 영원히 사랑하며 살자는 이야기인가” 싶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이 글자들이 복작복작 모인 아주 작은 도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도트는 0과 1입니다. 0과 1은 디지털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랑을 영원히 디지털로 남겨두자”는 이야기일까요.

동시대성, 새로운 해석, 아카이브에 기반한 전시로 국내 미술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일민미술관(관장 김태령)이 최근 선보이고 있는 전시의 제목이 ‘불멸사랑’입니다. 영어로는 ‘Immortality in the Cloud’죠. ‘구름 속의 불멸’ 정도로 직역될 수 있겠지만, 역시 여기서의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컴퓨팅’,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클라우드가 아닐까요.

‘불멸사랑’은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1~3층, 5층(신문박물관)에서 5월12일까지 문을 엽니다. 일민미술관의 올해 첫 전시입니다.

‘불멸사랑’에는 모두 여섯 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했습니다. 강이연, 권하윤, 서용선, 이우성, 조은지와 프랑스 아티스트 파비앙 베르쉐르입니다. 여섯 명의 작가는 역사, 신화, 종교, 사랑과 같은 ‘불멸의 가치’를 동시대성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구성해 선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주제, 각기 다른 시선입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아티스트가 파비앙 베르쉐르(44)입니다. 신화적인 모티프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역사를 탐구해 온 작가입니다. 팝 문화와 역사를 들여다보고 가상적이면서 판타지적인 암호들을 끝없이 만들어냅니다.

파비앙 베르쉐르는 제주도, 부산에서 한국의 신화와 전통문화, 역사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벽화, 드로잉뿐만 아니라 한국의 길거리 풍선간판, 한지 드로잉, 신문, 배지, 세라믹 조각 등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작가가 아니라 마치 국내 작가의 작품을 보는 듯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에서 작업을 하면서 치맥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얘기도 들려옵니다.

이우성(36) 작가는 익명의 청춘들을 화폭에 담아 시대성을 표상해 온 작가입니다. 작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이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그의 드로잉들은 마치 B급 만화나 웹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촛불집회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나누는 풍경,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마주한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굵고 검은 펜선으로 드로잉하듯 천에 그려놓았습니다.


조은지(46) 작가는 꽤 실험적인 작업을 보여줍니다. 진흙, 먼지와 같은 ‘도시의 부유물’을 이용해 영역이나 정신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실험입니다. 동물의 피부, 신체를 통해 직관되는 사회, 심리적 풍경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근대라는 역사의 테러(대단하죠!)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가변적인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언어로 발화되는 기억보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새겨진 기억을 더 신뢰한다”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퍼포먼스 설치작업인 ‘땅, 땅, 땅, 흙이 말했다(2019)’와 싱글 채널영상 ‘검정 우산을 쓴 여인의 초상(2019)’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검정 우산을 쓴 여인의 초상’이 보여주는 작가의 독특한 시선(렌즈를 통해 드러난)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강이연(37)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미디어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GPS부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플랫폼,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의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고 문화를 소비하는 이 시대에 주목하는 작가입니다.

툭 터진 공간에 세운 세 개의 벽, 바닥에 영상을 가득 비추고 그 안에 관람객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은 3층의 전시장은 아마도 ‘불멸사랑’ 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란하게 쏟아졌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빛과 영상 속에서 관람객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 작품의 시선은 그곳을 향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권하윤(38) 작가의 ‘새여인(2019)’도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VR을 이용한 ‘489년(2016)’이라는 작품과 함께 첫선을 보이는 스크리닝 버전입니다. 두 작품 모두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전해 들은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했습니다. ‘새여인’의 경우 유학 시절 스승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서용선 작가(68)는 여섯 명 중 가장 작품활동이 긴 작가입니다. 1980년대 초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해 역사적 기억, 신화적 상징들을 그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대형회화, 조각, 드로잉 등 70여 점에 달하는 작업들이 신문박물관에서 관람객을 기다립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오늘의 핫이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