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를 ‘죽도록’ 달린 남자, 박길수

입력 2019-05-23 18:45: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박길수 유니에버 대표이사.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에베레스트 217km를 무박 7일간 달려야 하는 지옥코스
고산증세로 블랙아웃, 2시간 동안 제자리서 뱅글뱅글
달리면서 무슨 생각하냐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캬!


요즘 산을 달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오프로드와 산지를 달리는 트레일러닝 붐 덕이다. 대회나 행사도 많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가 지난 18, 19일 강원도 강릉 일대에서 ‘노스페이스 100 코리아’를 개최했고 아크테릭스는 19일 북한산성에서 엔돌핀런 트레일러닝 클래스를 진행했으며 6월 1일에는 살로몬이 트레일러닝 아카데미를 도봉산 일대에서 연다.

박길수(53) 유니에버 대표이사이자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 고문도 산을 달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죽도록’ 달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울트라’다.

박 대표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를 오른 게 아니라 달리고 왔다. 대회 이름부터가 무시무시하다. 에베레스트 135마일 익스트림 트레일런대회. 135마일(217km)의 코스를 150시간 내에 완주해야 하는 지옥의 레이스다. 서울에서 대구정도의 거리를 도로가 아니라 해발 3000~5000미터의 험지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가장 높은 고지는 해발 5400m에 달한다. 올해 처음 열렸지만 세계적인 울트라마라토너, 트레일러너들도 이 대회의 코스만큼은 혀를 내두르며 ‘현존하는 최고 난이도이자 최악의 코스’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50시간이면 넉넉할 것 같지만 쪽잠을 자가며 무박 7일을 달려야 가까스로 골인에 성공할 수 있다. 박 대표는 144시간 08초 만에 완주해 세계에서 여섯 번째, 한국에서는 최초의 완주자가 되었다.

사진제공|에베레스트 135마일 익스트림 트레일런대회 조직위


● 50대 중반에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217lkm 완주

스포츠동아 인터뷰실에서 만난 박길수 대표의 첫 인상은 단단하면서도 편해 보였다. 산꾼과 마라톤맨을 반반씩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다. 맥주 잘 마시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인데 사진촬영을 위해 트레일러닝 복장을 갖추고 배낭을 메니 분위기가 싹 달라져 버렸다.


- 이번 에베레스트 대회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면.

“이 대회의 핵심 포인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코스에서 열린 대회라는 것이다. 코스의 안내표시나 마킹이 없이 오직 GPS에만 의지해서 달려야 한다. 중국의 스포츠클럽이 개최했는데 지난해 10월에 시범대회를 한 차례 열었고, 올해가 첫 공식대회였다. 나가고 싶다고 아무나 받아주는 대회가 아니다. 대부분 사전심사에서 탈락했고, 전 세계에서 나를 포함해 7명이 초청되었다.”


- 150시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인데,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부족하다. 코스에는 중간중간 총 20개의 CP(체크포인트·Check Point)가 있는데 CP마다 제한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시간 안에 CP에 도착하지 못하면 중도탈락이다. CP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휴식을 오래 취할 수도 없다. 잠을 거의 안 자고 논스톱으로 달려야 제 시간에 골인할 수 있다.”


- 대회 중 하루 일정이 궁금하다.

“첫날은 체력이 가장 좋을 때라 오전 7시에 출발해서 CP 5까지 달렸다. 꼬박 24시간을 1분도 안 자고, 그대로 갔다. 둘째 날부터는 하루 1시간, 많이 힘들면 2시간 정도씩 자면서 간다.”


- 잠과의 싸움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맞다. 체력보다 잠과의 싸움이 관건이다.”


- 정신력과 체력이 고갈되는 후반이 역시 가장 힘들지 않을까.

“CP 17을 넘어갈 때였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직벽을 (지그재그 코스를 따라) 계속 올라가야 했는데 밤이 되니까 체력이 떨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가물가물하다 정신을 퍼뜩 차려보면 스틱을 쥔 채 서서 졸고 있었다. 바로 밑은 천길 낭떠러지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바위틈에 기대서 10분 정도 눈을 붙여야 했다.”


- 상상만 해도 살이 떨린다. 너무 위험하지 않나.

“그래서 야간의 위험구간에서는 안전요원이 따라붙는다. 안전요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선수를 뒤따를 뿐이다. 선수가 가면 따라오고, 선수가 서면 서고. 그렇게 다음 CP까지 동행 아닌 동행을 한다.”

사진제공|에베레스트 135마일 익스트림 트레일런대회 조직위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대회 4일째 CP 16에서 17로 넘어가는 구간이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이 대회는 중도 포기를 해도 스스로 걸어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나 끝까지 가나 그게 그거다. 그래서 다들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웃음). 아참, 위기가 한 번 제대로 있었다.”


- 어떤 위기였나.

“CP에서 밥도 잘 먹고 생리현상도 해결하고 나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나보다 1시간 앞서 출발한 친구가 중간에 힘들어하고 있더라. 고산병 증세 같았다. ‘먼저 가겠다’ 하고 올라가는데 해가 어두워지면서 그만 블랙아웃(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끼거나 심하면 의식을 잃는 현상)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정확히 어떻게 된 건가.

“분명히 나는 열심히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제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던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작해야 이 방만한 크기의 공간을 두 시간이나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거지. 선수들마다 주최 측으로부터 지급받은 GPS를 부착하고 있었는데 컨트롤센터에서 수상하게 여겼던지 운영요원 두 명을 보내줬다.”


- 컨트롤센터에서 발견해 다행이다. 큰일 날 뻔했다.

“고산증세 중 가장 흔한 증상은 두통이고 사람에 따라 구토, 멀미, 사지 저림 등이 나타나는데 돌아와서 의사를 만나보니 나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나 환각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더라. 실은 고산증세에 대비해 약을 준비해 갔었는데 별 이상이 없어 먹지 않은 상태였다.”

- 결국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토록 힘들고 위험한 레이스를 하는가.

“도전의 맛이다. ‘내 인생의 도전은 끝이 없다’가 나의 인생 모토다. 너무나 힘이 들지만 완주를 하고나면 좀 더 익스트림하고, 좀 더 난이도가 높은 곳을 찾게 된다. 이유는 그뿐이다.”

박길수 대표는 지난해 9월 중국 고비사막 400km 무지원 논스톱대회에 참가해 129시간 46분 09초의 기록(제한시간 148시간)으로 완주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의 달리기 이력은 프로 위의 프로다.

끝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고된 달리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가”라고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 생각도 회사 일 생각도 아니다. 그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캬아! 어쩌면 우리는 그 맛에 달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하!”

사진제공|에베레스트 135마일 익스트림 트레일런대회 조직위


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던 전설적인 산악인처럼 박 대표는 그곳에 도전이 있어 ‘죽도록’ 산을 달리는 사람이었다. 어느덧 50대 중반의 나이. 철인에게는 여전히 ‘한창 달릴 나이’지만 그에게도 ‘마지막 코스’는 있었다. 서울에서 휴전선을 넘고 평양을 거쳐 유라시아로 나가 대륙횡단을 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다.

“11월에 한국과 중국이 함께 제주도 한라산에서 개최할 예정인 트레일런대회를 위해 내일 중국출장을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선 박 대표는 그저 이 일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누구라도 산을 달려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산을 ‘죽도록’ 달리고 난 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진하게 나누고 싶어졌다.


● 박길수 대표


▲ 출생 = 1966년 강원도 정선 ▲ 학력 = 한림대 중국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 석사 ▲ 주요경력 = 1994 설악산 산악마라톤대회를 계기로 트레일러닝 본격 시작, 2004 몽골 썬라이즈썬셋 100km 대회 완주, 2012 베이징 TNF 대회 완주, 2015 UTMB(울트라트레일몽블랑) 대회 완주, 2018 중국 고비사막 400km 무지원 논스톱대회 완주, 2008~2010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 회장, 2015~2017 국제트레일러닝협회 한국대표, 현 유니에버 대표이사, IAU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지역대표 및 상임이사,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 고문, 대한트레일러닝협회(KTRA) 회장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오늘의 핫이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