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산방에서 출간한 \'매일50: 매일유업 50주년 사사+한국 낙농 유가공사 총서’가 2020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커뮤니케이션-퍼블리케이션 부문을 수상했다. 사진은 수류산방 크리에이터 박상일 방장(왼쪽)과 심세중 실장. 사진제공ㅣ수류산방
사사(社史) 출판의 유쾌한 반란을 일으킨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 인터뷰
● <매일 50> 세계 3대 디자인상 수상…출판판 ‘기생충’의 쾌거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석권하며 세계 영화계를 뒤집을 무렵, 출판판 ‘기생충’이 한국에서 터졌다. ‘작지만 강한, 고집스럽게 독특한 출판’의 길을 걸어 온 수류산방이 3년간 공들여 만든 ‘매일유업 창사 50주년 기념 사사(社史) <매일 50>’이 ‘2020 아이에프(iF) 디자인 어워드’의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독립 기구인 ‘iF(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가 주최하는 ‘iF 디자인 어워즈’는 1953년부터 시작된 디자인계의 권위 있는 상으로 세계 3대 디자인상 중의 하나로 꼽힌다. 올해는 전 세계 7,500여 곳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경자년 이른 봄 날, 2003년부터 ‘수류산방’을 꾸려(?)온 박상일 방장과 심세중 실장을 만나 수상작 <매일 50>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적인 디자인상 수상을 축하한다.
“고맙고 쑥스럽다. 3년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힘든 길을 걸어 온 수류산방 식구들과 객원으로 참여해 도와준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특히 창업주의 치적 위주로 제작되는 우리나라 사사의 흐름에서 ‘아카이브 북’ 형태라는 초유의 도전을 받아드린 매일유업 관계자 분들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매일유업은 김정완 회장(왼쪽)이 포함된 사사편찬 TF를 구성하고 크리에이티브를 신뢰했다. <매일 50>은 클라이언트의 전폭적인 믿음과 지원 덕에 탄생했다. 김정완 회장과 사사편찬 논의를 하고 있는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오른쪽)과 심세중 실장(가운데). 사진제공ㅣ수류산방
● 매일유업 김정완 회장이 어느 날 새벽 초라한 수류산방을 찾은 까닭
-사사 제작은 그동안 ‘수류산방’이 추구해 온 무늬와 결과와는 간극이 있다. 출간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2016년 12월 이른 아침이었다. 꼬박 밤을 새고 사무실에서 일출을 맞았는데 옆집 아저씨처럼 편한 차림의 남자가 혼자 쓱 들어왔다. 매일유업 김정완 회장님이었다. 대뜸 “한국 낙농사를 좀 정리했으면 좋겠어”라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그게 매일유업 50주년 사사 프로젝트 <매일50>의 출발점이었다.”
-수류산방은 작은 회사다. 물론 이곳저곳에서 큰 상은 받아 실력은 입소문을 탔지만 대기업의 사사를 하기엔 ‘몸집’이 다소 작은데 ‘겁도 없이 덜컥’ 출판을 결정했는데….
“매일유업 창립 50주년은 매일유업이 걸어 왔고 이 땅과 사람들에게 기여해 온, 꼭 기록해야 할 역사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매일 50>을 편집하고 출판해 내는 시간과 경험은 수류산방의 역사도 된다. 매일유업 50년사에서 5%쯤을 헤아리는 시간 동안 수류산방은 매일유업의 지난날들,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 낙농사를 처음 알기 시작해서, 용어도 헷갈리던 날로부터 차츰 걸음마를 하고 말하고, 읽고 쓰게 됐다.”
-매일유업이 50주년 사사를 의뢰했을 때 많은 기업들이 그렇듯이 주문 사항이 많았을 텐데.
“<매일 50>은 매일유업의 창업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사사(社史) 및 그에 딸린 아카이브와 일련의 프로젝트다. 매일유업의 요청 중 하나는 한국 낙농·유가공업의 역사를 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공공적 의지였다. 이 프로젝트는 한 기업의 역사를 아카이브의 형식으로 정리하고, 그 아카이브를 책의 형식 안에 어떻게 재구성해 내느냐, 그리고 역사의 거시적 미시적 관점을 함께 담을 수 있느냐, 기업의 사사가 과정과 결과에서 풍성하게 변주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도전이었다.”
● 매일유업 회장님이 포함된 사사 TF 구성…크리에이티브와 정보 믿음 공유
-새로운 포맷이라 애로 사항도 많고, 클라이언트인 매일유업과 아이덴티티가 공유되지 않으면 힘든 작업이었을 텐데.
“마감 중에도 거의 매일 회의를 운영해 다양한 성격의 새로운 원고를 수용할 수 있는 포맷의 보완을 공유하고, 서로 작업의 변천을 회람하며 완성도를 높여 갔다. 클라이언트인 매일유업은 최고 경영진이 포함된 TF를 구성하고 크리에이티브를 신뢰했다. 그 덕에 3년간 원활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가능했던 <매일 50>은 국내에서 한 기업의 몇 십 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사사’라는 디자인물이 덤이 아니라 주인공으로서 한가운데서 빛을 발한 최초의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iF 어워드’에서도 한국의 사사가 수상한 것은 지난 10년 중 유일하다.”
-사사 <매일 50>은 매우 독특한 책이다. 기존 사사의 틀을 깨는 판형은 물론이고 창업주 ‘용비어천가’ 위주를 벗어나 ‘한국 낙농사’라는 파격적인 형태, 신문을 닮은 종이책처럼 제작됐다.
“그렇다. 수류산방에서 의도한 ‘아카이브 북’은 매일유업이 일군 50년의 나날이 차곡차곡 쌓인 신문과 같은 책이다. 기자들이 촘촘히 짜낸 한 면 한 면을 넘기다 보면, 평소에 별로 관심이 없던 이 세계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최첨단의 시대로 갈수록 종이책이야말로 ‘희소함’과 ’여유’의 상징이다. 제작 기간 32개월 내내 일간지 편집부와 똑같이 분주했다. 대강 하루에 매일유업과 한국 낙농 유가공업의 한 달치 역사를 여러 기사로 엮어 4면짜리 신문을 편집하는 일과를 보낸 셈이다. 전국의 공장들을 몇 번씩이나 취재하고 현직 사원들과 퇴사한 원로들을 만나 현장의 소리,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32개월 제작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도 그렇고, 디자인도 특별해 출판 역사를 새로 쓴 듯한 느낌도 든다.
“하루에 타블로이드판 신문 편집팀이 2면씩 완성한다면 총 5년 반이 걸린다. 50년은 2,000여 편의 기사로 완성되었고, 별도로 200자 원고지 기준 3,800매 분량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책에 최종 수록된 사진은 5,800여 장이다. 3년간 실제 투입 인원은 30여 명이었다. 이 포맷은 서로 역량과 성향이 다른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각자의 부분을 창의적으로 해석할 때도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는 약속으로서, 디자인의 협업과 창의력에 대한 귀한 경험이 되었다. 쪽수뿐만 아니라 규격도 방대하여 한국에서 산업적으로 제본 가능한 가장 큰 규격(높이 420mm)에 도전했다. 총 5권의 아카이브 북은 풍부하고 방대하지만 각 권은 친환경 재생 용지를 사용해 그 크기 에 비해 더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육중함이나 견고함이 아닌 유연함과 역동성을, 과거의 박제보다는 미래적 지향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지난 50년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듯, 최종 독자들이 책을 통해 경험하는 신체성을 염두에 두었다.”
● 사사의 새 장을 열다…출판사도 해 본 적 없는 통쾌한 실험과 반란
-사사의 새 장을 열었다. 이번 <매일 50>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의 사사가 나올 것이다. 미래의 사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매일 50>은 단순히 50주년 사사가 아니다. 아카이브 방법론에 대한 실험이자 한국 기업의 사회적 윤리 선언이다. 우리는 <매일 50>에 한 개인이나 기업의 일방적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농촌으로부터 도시까지, 낙농가로부터 소비자까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기업의 대표로부터 협력사까지, 경영진부터 공장 생산 라인과 노조까지, 일본과 유럽까지, 학계부터 매장까지… 여러 얼굴들을 조금 더 촘촘하게 엮고 싶었다. 자료를 정직하게 집적하는 일과, 누구나 쉽게 읽도록 엮는 일을 동시에 벌였다. 한국의 기업사는 곧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사 자료가 될 것이다. <매일 50>은 그 자체로 한국의 근대화를 개척한 어떤 기업도, 근대사와 경제사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도 감히 해 본 적 없는 길을, 한국의 어떤 광고 대행사나 디자인 회사, 출판사도 감히 해 본 적 없는 실험이고 작품이다. 앞으로의 사사는 과거의 정리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그리기 위한 바탕이라는 클라이언트의 철학을 구현하는 쪽으로 방향키를 틀 것이다. <매일 50>이 첫걸음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