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로 들여다보는 마리 퀴리’ 김소향의 마리를 보아야 하는 이유

입력 2020-09-13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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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라는 인물의 디테일 … 손에 잡힐 듯한 정밀함
‘밝고 단단한 슬픔’ 연기는 과연 김소향 만의 것
이봄소리, 김찬호, 박영수, 김아영 등 … 탄탄한 연기 돋보여
“여자가 왜 과학을 하느냐고 묻는 건가요”,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빈 자리를 위한 내 이름을 갖고 싶어.”

이 세 개의 대사는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라는 인물을 곧바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 썩 잘 만들어진 뮤지컬을 꿰뚫고 나란히 달리는 세 개의 도로다.


9월 27일(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막공을 앞두고 있는 뮤지컬 ‘마리퀴리’는 작품의 빈틈이 좀처럼 체감되지 않는 수작이다. 빈틈이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말 그대로 ‘작품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장면과 장면을 뚝 잘라 붙이는 대신 경첩으로 이어놓은 듯한 흐름이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상당히 세련된 연출이지만 남용되지 않는다.

마리 퀴리라는 인물의 디테일이 손으로 만져지는 듯 촉감적이다. 예를 들어 라듐 연구 실험실에서의 ‘톡톡톡’ 세 번의 두드림은 시력을 잃는 루이스를 통해 재생된다. 마리는 누군가와 악수를 하기 전 반드시 오른손을 뒤로 빼 옷 위로 슥슥 문지르고는 힘차게 상대를 향해 손을 내민다.

손이 뒤로 빠질 때의 마리는 악수를 위해 손을 뻗는 마리와 다르다. 이와 같은 미묘한 차이가 디테일을 살린다.


김소향 배우의 마리를 보았다. 초연 때부터 마리를 연기했던 김소향은 공교롭게도 다른 작품에서도 ‘마리’라는 동명이인의 캐릭터를 맡아(예를 들어 최근에는 루드윅:베토벤 더 피아노가 있었다) ‘마리 전문배우’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김소향은 힘 있는 소리를 가진 배우다. ‘힘’하면 옥주현과 차지연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이들과는 느낌과 맛이 사뭇 다르다. 옥주현의 기품 있는 윤기, 차지연의 심연 같은 어두움이 김소향의 소리에서는 빠져 있거나 강조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밝고 상냥한 소리다. 하지만 듣다 보면 의외로 단단하고 무겁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점점 단단하고 무거워지고 있다. 그가 표현하는 ‘밝고 단단한 슬픔’은 확연히 김소향 만의 것이다.

김소향이 표현하는 슬픔은 관객으로 하여금 숨도 못 쉬도록 짓누르는 법이 없다. “지금 이 사람의 슬픔이, 아픔이 얼마나 거대한 줄 알아?”하고 관객을 윽박지르는 대신 그냥 그 사람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게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관객은 수긍하고 만다.

김소향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떤 역을 맡아도 김소향’이라든가 ‘김소향 특유의 해석’ 같은 것을 드러내는 배우가 아님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대신 김소향은 자신이 맡은 인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서는 그와 꽤 긴 시간을 보내고 나온 사람처럼 보인다. 그 결과 무슨 역을 맡아도 캐릭터가 수긍하게끔 살아난다. 마리 퀴리에서 이러한 김소향 연기의 정점을 볼 수 있다. 김소향이라는 유리창을 통해 캐릭터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처럼 투명한 유리같은 연기라니!


김소향 다작의 비밀은 의외로 이런 곳에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안느 코발스키 역 이봄소리의 연기도 흡족하다. 마리의 연기를 지지하면서도 안느라는 개성있는 캐릭터를 명료하게 드러냈다. 튀려고 하지 않는데 튀어 나온다. 마리와의 이중창은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어지간히도 찾아대는 이중적 인격의 사업가 루벤 뒤퐁은 김찬호, 마리 퀴리의 완벽한 후원자 역할을 수행해낸 남편 피에르 퀴리는 박영수가 맡았다.

조쉬 역의 김아영 배우는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노년의 마리와 딸로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살짝 긴장되어 보였지만 이후는 등장하는 장면마다 씬스틸러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한국 창작뮤지컬의 현재적 수준과 제작 능력을 보여 준 또 하나의 작품으로 꼽기에 조금도 민망할 게 없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총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막공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놓치지 마시길. 한 번 보셨던 분이라면 다시 한 번 보아 두시길.
거침없이 권해드리고 싶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라이브, 쇼온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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