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애런 브룩스. 스포츠동아DB
그러나 야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직장생활, KBO리그 구성원들의 경우에는 프로야구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프로야구는 기꺼이 그깟 공놀이가 되어도 좋다. 아니 되어야 한다. 어느새 불혹이 임박한 KBO리그에도 당연한 것이 점차 당연해지고 있다. 리그 품격의 상승은 어떤 기술의 발전보다 더 반가운 변화다.
애런 브룩스(30·KIA 타이거즈)는 22일 황급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거주 중인 아내 휘트니, 아들 웨스틴, 딸 먼로가 신호위반 차량에 부딪혀 사고를 당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KIA는 발 빠르게 비행기를 수소문했고, 브룩스는 소식을 들은 당일 오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맷 윌리엄스 KIA 감독은 “야구보다 중요한 게 있다”며 브룩스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재입국 후에도 2주간 자가격리를 거쳐야 하고, 팀이 치열하게 5강 싸움을 펼치고 있는 상황은 고려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KT 선수단이 24일 수원 KIA전에 앞서 KIA 브룩스 가족의 쾌유를 비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사진제공|KT 위즈
주장 양현종을 필두로 한 KIA 선수들 모두 모자에 아들 웨스틴의 이름을 적었다. 양현종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팬들에게 해시태그(#WWMB36) 캠페인을 독려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상 KIA와 KBO리그에서 브룩스는 이방인, 용병이 아닌 ‘동료’다.
KBO 사무국부터 변화를 리드했다. KBO는 지난해 5일간의 경조사휴가 제도를 도입했고, 많은 선수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출산을 함께하거나 임종을 지켰다. 위중한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휴가를 냈지만, 구단의 반대로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했던 손아섭(32·롯데 자이언츠)의 슬픔이 불과 5년 전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리그 구성원들은 몇 단계 성숙해졌다. 성적을 위한 장기 말로 여겨지던 선수들이 이제는 온전히 개인으로 존중받고 있다.
KIA 팬들이 24일 수원 KT 위즈전에 앞서 브룩스 가족의 쾌유를 비는 마스크를 제작해 구단에 보냈다. 선수단은 직접 마스크를 착용하며 진심을 공유했다.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법을 초월한 억지논리도 사라졌다. NC 다이노스는 8월말 김유성(김해고)의 1차지명을 철회했다.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 전력을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라 규율이 있는 생활을 하다보니 벌어진 일’이라는 해묵은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좋은 선수’는 어디까지나 야구인의 관점이다. ‘치외법권’을 허문 NC의 선택은 그래서 과감하고 의미 있다.
KBO는 류대환 사무총장의 주도 하에 리그 전체의 파이를 키우며 산업화에 다가서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두가 힘들지만, 연초 대형 메인 스폰서십 계약을 성사시킨 덕에 걱정을 좀 덜었다. 뉴미디어 중계권 잭팟으로 구단 살림살이에도 숨통이 트였다. 선수단 평균 연봉은 1억3448만 원에 달한다.
‘억대연봉’이 평균인 직장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의식이 따르지 못한 문화지체 현상이 뚜렷했다. 야구라는 지상과제 아래 희생이 강요됐다. 그러나 이제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고 있다. 비로소 ‘우선순위에서 밀린 그깟 공놀이’가 더없이 반가운 이유다.
수원|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