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 레이더] 일시교체 선수의 유니폼과 ‘Wag the Dog’

입력 2021-01-25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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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아DB

‘Wag the Dog’이란 영어 관용구가 있다.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뜻으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말하는 속담이다. 최근 V리그에서 이 표현에 들어맞는 사례가 하나 나왔다.

OK금융그룹은 지난해 12월 31일 한국배구연맹(KOVO)에 부상선수 일시교체 공지를 요청했다. 베테랑 리베로 부용찬을 빼고 신인 최찬울을 등록하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부상이 발생하자 다른 선수를 하루라도 빨리 투입해 빈자리를 메우고 싶었지만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유니폼 때문이었다. KOVO에 선수등록을 하려면 1~20번 사이만 사용할 수 있다. 최찬울이 이번 시즌을 앞두고 KOVO에 선수등록을 했을 때 등번호는 23번이었다. 부용찬의 등번호 10번으로 바꾼 새 유니폼이 나오는 데 무려 일주일이 걸렸다.

OK금융그룹 실무자는 “유니폼을 제작하는 공장의 사정에 따라 대기시간이 다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공장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줄어 처음에는 3주를 기다리라고 했다. 공장에 가서 사정해서 일주일 만에 유니폼이 나왔다. 구단마다 한두 번은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V리그 선수들의 유니폼은 특수기능의 섬유로 제작된다. 선수들의 몸에 딱 달라붙도록 만들어지는데 문제는 등번호다. 20번 이후의 번호를 가진 선수가 긴급히 등록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새 유니폼을 주문·제작해야 한다. 공장에서 다른 작업을 멈추고 제작해줘야 한다. 소량주문인 데다 실익이 많지 않다보니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 ‘급한 사람이 먼저 우물을 판다’고 구단 직원들이 공장에 읍소를 해야 한다.

선수단 엔트리를 늘리는 것은 각 구단의 이해관계가 얽혀 KOVO 이사회의 합의가 필요하다. 선수등록번호를 20번 이후로 허용하는 것도 생각만큼 단순하진 않다. 현재 V리그에서 사용하는 경기기록 시스템 때문이다. 오프라인 기록과 온라인 기록을 모두 사용하는데, 오프라인 기록지는 20번까지만 가능하다. 만일 선수의 등번호가 늘어나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온라인 기록 시스템은 프로그램만 수정하면 되기에 해결책이 쉬울 수 있다.

다른 문제도 있다. 선수교체 때다. 세트당 6번의 선수교체가 이뤄지는데, 현재 배구는 1~20번까지 각각 새겨진 교체판을 들어서 심판에게 알리는 방식을 쓴다. 등번호가 늘어나면 교체판의 숫자도 늘어나야 한다. 축구처럼 대기심이 번호를 조작하는 교체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배구는 축구보다 선수교체가 자주 발생한다. 조작이 복잡한 교체판은 경기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다. 국제배구연맹(FIVB)이 1~20번까지만 등번호를 허용하는 이유에는 이런 사정도 숨어있을 것이다.

선수 유니폼에 새겨진 단순한 등번호 교체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해결이 어려운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긴다. 개혁과 혁신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도 악마가 숨어있다는 이런 디테일에 있을 것이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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