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시간을 쌓다 왕궁 옆 동네 (서울 서촌)

입력 2021-03-18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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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서쪽 마을, 서촌. 인왕산 아래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 등 서울의 최고령 동네를 한데 일컬어 부르는 유서 깊은 동네다.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가 되고 조선 시대의 수묵화가 다시금 화가의 캔버스에 펼쳐지는 등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며 특유의 ‘서촌스러운’ 정취를 자아내는 곳. 백열네 번째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유구한 시간이 층층이 쌓인 동네, 서울 서촌을 천천히 걸어본다.

인왕산 초소책방

인왕산 자락 길을 오르던 김영철의 눈에 들어온 숲속 책방.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세웠던 경찰초소를 리모델링한 북 카페이다.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원한 경치 덕분에 아는 사람들만 찾는, 서울의 전망 명소로 불린다는데. 김영철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깨어나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서울 서촌 여정을 시작한다.

한옥집 어머니와 우쿨렐레

인왕산에서 내려온 김영철은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을 지나 서촌 여행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아담한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정겨움을 자아내는 좁은 골목을 미로 찾기 하듯 걷던 김영철은 한옥집 어머니를 만난다. 상경해 처음 마련한 체부동 한옥에서 40년을 사셨다는 어머니는 옛 이웃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봄을 맞이하고 계신데. 많은 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골목 화단에 꽃을 심으며, 그 옛날 이웃들로 북적이던 동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떠난 이웃들의 빈자리를 취미인 우쿨렐레 연주로 채우는 어머니. 좁다란 서촌 골목엔 어설픈 게 포인트인 어머니의 우쿨렐레 연주가 울려 퍼진다.

新 인왕제색도 그리는 서촌 옥상화가

서촌 사람들만의 특권이 있다면, 인세권(인왕산+역세권)?! 골목 어디에서나 인왕산이 보이고, 마실 돌듯 인왕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 입구에서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을 마주한 김영철. 남아있는 수성동 계곡과 정선의 그림이 겹쳐질 듯 그대로인 모습에 변치 않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새삼 느낀다. 계곡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던 김영철은 빌라 옥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옥상 화가를 발견한다. 20년 넘게 해오던 기자를 그만 두고 8년 전부터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옥상 화가. 인왕산, 한옥, 적산가옥 그리고 빌라까지.. 서울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듯한 서촌 풍경에 빠져 서촌 이 집 저 집의 옥상을 오르고 있단다. 모르는 사람들은 ‘옥상 동냥녀’라 부르기도 하고,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를 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지만, 서촌을 향한 옥상 화가의 외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행촌동 붉은 벽돌집의 비밀 ‘딜쿠샤’

성곽을 따라 행촌동으로 걸음을 옮긴 김영철은 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 장엄한 자태의 은행나무를 보고 걸음을 재촉한다.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에 감탄하고 뒤를 돌아서니, 서양식의 빨간 벽돌집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고대 인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딜쿠샤’라는 이름을 가진 가정집. 집주인은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하던 미국 AP통신의 기자 앨버트 테일러 가족이다. 그는 3.1운동 독립 선언서와 제암리 학살 사건을 기록하고 보도해 전 세계에 알린 장본인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숨은 조력자였다. 그리고 올해 3월 1일, 그의 행적을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3년간의 복원과정을 거쳐 당시 모습과 최대한 동일하게 재현한 전시관으로 문을 열었다.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일까. 김영철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뒷이야기를 듣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청년 파티시에가 꿈꾸는 서촌의 봄

서촌에는 한옥, 적산가옥, 빌라가 한데 뒤섞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유의 '서촌스러운' 정취가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이 들어선 서촌의 거리를 걷던 김영철의 눈을 사로잡는 건 알록달록한 무스 케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 28세 젊은 파티시에가 중학교 때부터 품어왔던 꿈을 펼친 공간이란다. 새벽 별 보며 출근해 둥근 달 보며 퇴근하기를 6년 끝에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2년 전 본인의 가게를 열었다는 파티시에. 하지만 코로나 19로 시작부터 매 순간이 고비이자 위기였다는데. 그럼에도 청춘의 패기로 자신의 디저트를 지키기 위해 오뚝이처럼 일어나 서촌 골목을 지키고 있단다.

채식 모녀의 연잎 밥상

김영철은 한옥 식당들이 많은 골목을 걷다 ‘자연식’ 글귀가 걸린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는데, 마당에선 모녀가 연잎을 다듬고 있다. 이곳은 연잎밥에 오신채를 쓰지 않는 채식 음식을 만드는 식당으로, 고기 냄새도 맡지 못하는 타고난 채식주의자였던 어머니와 나쁜 식습관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겼던 딸이 자연 식재료의 중요함을 여실히 깨닫고 직접 담근 장과 효소로 맛을 내고, 채소 육수로 감칠맛을 더한 건강한 한 끼를 내놓고 있다. 채식 모녀가 만드는 건강하면서 맛있는 자연 밥상. 과연 그 맛은 어떨까?



주민들이 지켜낸 추억의 오락실

관광지로 주목받으며 외부인이 부쩍 많아진 서촌 거리. 변화의 바람이 불며 쌀집, 이발소 등 40년 넘은 오래된 가게들은 자취를 감추고 트렌디한 가게들이 들어선 거리 한복판에 여전히 추억의 오락실이 남아있다. 최신 게임은 가라! 보글보글, 테트리스, 두더지 잡기.. 고전 오락만 있는 오락실도 한때는 존폐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는데. 2011년, 주인 할머니가 30년간 운영하던 오락실이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 옛날 오락실을 제집 드나들었던 서촌 키즈들이 ‘전자오락수호대’를 꾸려 십시일반 돈을 모아 오락실을 인수해 추억의 공간을 지켜냈단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오락실은 동네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동네 꽃집의 뽀빠이 아빠와 딸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든 김영철. 빌라 1층에 위치한 ‘꽃집인 듯, 꽃집 아닌, 꽃집 같은’ 화원을 발견한다. 이 꽃집의 명물은 손님이 직접 꽃을 골라서 만드는 단돈 5천 원의 미니 꽃다발. 커피 한 잔 가격에 부담 없이 꽃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주인장의 고운 마음씨가 담겨있다. 이곳은 30년이 넘은, 서촌에서 가장 오래된 꽃집. 키는 작아도, 누구보다 힘이 세 별명이 ‘뽀빠이’였던 1대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던 날 문을 열었단다. 8년 전, 아버지가 더 이상 꽃집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자, 정해진 운명처럼 딸이 꽃집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청춘이 담긴 일터를 지켜내고 있는 딸. 영원한 뽀빠이인 아버지를 위해서 오늘도 꽃집 문을 활짝 열고 있단다.

지구촌 손님을 기다리는 게스트하우스 부부

서촌에서 한옥을 마주하는 일, 참 쉽다. 한창 봄맞이 집 단장 중인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한 김영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한옥과 양옥이 마치 한 몸처럼 붙어있는 신기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부부는 6년 전 오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소담한 마당이 어여쁜 지금의 집으로 입성하게 됐단다. 그 후 게스트하우스의 G자도 모른 채 덜컥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손짓 발짓으로 지구촌 손님들과 소통하며 한국인 특유의 진득한 ‘정’을 나눴단다. 특이한 건 부부의 공동일기장. 부부의 보물 1호로 35년 결혼생활의 희로애락을 함께 기록해왔단다. 은퇴 후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함께 일기를 쓸 꿈을 꾸었던 부부. 하지만 지금은 서촌의 한옥으로 지구촌 손님들을 불러들여, 자신들만의 특별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

경복궁과 청와대, 한옥과 빌딩.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서울 서촌. 켜켜이 쌓인 시간 위에 다양한 이야기로 지금의 서촌을 만들어 가는 이웃들은 3월 20일 토요일 저녁 7시 10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4화 시간을 쌓다 경복궁 옆 동네 – 서울 서촌] 편에서 만날 수 있다.동아닷컴 이슬비 기자 misty8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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